동문오피니언
지용택(56회) 칼럼/왜 '사기(史記)'인가 (4)(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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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6.)
[지용택 칼럼] 왜 '사기(史記)'인가 (4)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 진시황릉
사기(史記) '본기(本紀)' 12편 중 '진(秦)본기'와 '진시황(秦始皇)본기' 두 편이 있어 학자들 사이에 이론이 많다. 진시황은 황제이기 때문에 본기에 합당하지만 진나라는 제후국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므로 본기에 기록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논거를 들어 주장한 인물은 당(唐)대의 사학자이며 통사(通史)를 쓴 유지기(劉知機, 661~721)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논리에 불과하다.
진나라는 9대 목공(穆公), 25대 효공(孝公)을 거치면서 개혁을 지속해 나라의 기초가 강건해지고 진시황의 증조부인 28대 소양왕(昭襄王)에 이르러서는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제후국들이 모두 실질적으로는 진나라에 굴복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31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것은 자신의 공로도 크지만 조상들이 일궈 놓은 토대가 훌륭했던 덕분이므로 행운아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진본기'는 진시황 이전에 이미 천하를 지배해온 왕조라는 뜻이 된다.
진나라의 조상들은 요·순임금 때부터 짐승과 말을 잘 다루는 공으로 벼슬을 했다. 진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비자(非子, ?~?)도 주(周)나라 효왕 때 말을 잘 키우고 관리하는 능력을 높이 평가받아 지금의 감숙성 천수현 동북쪽에 작은 봉읍을 하사받아 근거지를 만들었다.
이곳은 매우 외져 전국칠웅(戰國七雄) 중 문명과 문화면에서 가장 뒤처져 있었다고 평하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말이란 오늘날 우리가 승마나 경마장 같은 곳에서 보고 대하는 그런 말이 아니었다. 비록 안장, 굴레, 재갈, 등자 같은 것이 오늘날처럼 발달해 있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말은 신앙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권세의 상징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관념으로는 말을 잘 키운다고 봉읍을 줬다면 이상하게 생각되겠지만, 당시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우리나라에도 말에 대한 기록이 '삼국유사'에 처음 보이지만, 고대 세계에서 말이란 오늘날의 전차(戰車), 최첨단 전투기, 초고속열차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말을 잘 키우고 다룬다는 것을 오늘의 관점으로 본다면 진나라는 실리콘밸리에 맞먹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말은 전장의 지배자였으며 기병은 장군과 병사들을 이끄는 선봉이었기에 말을 잘 다룬다는 것은 상무(尙武)정신이 자연스럽게 몸에 밸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 외부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과감하게 받아들여 개혁을 추구하고, 내실을 쫓으니 국운이 크게 융성했다. 진시황의 싱크탱크였던 이사(李斯)는 "제후를 멸하고 제왕의 사업을 이뤄 천하를 통일한다"는 기치 아래 진시황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기원전 237년 진의 치수사업을 맡고 있던 정국(鄭國)이 한(韓)나라에서 파견한 첩자임이 밝혀져 진나라의 다른 객경(客卿)들과 함께 축출될 위기에 처했다. 그는 이때 유명한 '간축객서(諫逐客書)'를 지어 진시황에게 올린다. 그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신이 듣기에 관리들이 객경을 축출할 것을 의논한다 하니 이는 잘못이며, 목공에 이어 진나라 왕들이 4대에 걸쳐 계속해서 임용해 그들의 슬기로 빛을 본 객경 백리해(百里奚), 상앙, 장의, 범수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오늘날 진나라의 강대한 명성과 내실 있는 부를 갖추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만약 이렇게 재주있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배척한다면 무기를 적에게 내주는 것이고 식량을 도적에게 제공하는 것과 같으니 사람을 가볍게 대하는 것은 웅대한 뜻을 지닌 영명한 군주의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에 가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태산은 작은 흙덩이도 사양하지 않기에 그 웅대함을 이루고, 강과 바다는 가는 물줄기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기에 그처럼 넓고 깊은 것이다. 왕자(王者)는 백성들을 물리치지 않기에 그 덕을 밝힐 수 있다(泰山不辭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王者不却衆庶, 故能明其德)'.
이사는 '간축객서'를 통해 객경을 홀대하지 말고 포용해 이들을 더 많이 등용하라고 간언한다. 진시황은 이 글을 읽고 '축객령'을 취소하니 이사를 비롯한 많은 인재들이 진나라에서 활동하게 된다. 밖으로는 창업 때부터 가지고 있던 상무정신을 유지하고, 내부로는 다른 지역의 출중한 인재들을 활용해 지속적인 개혁을 성취하니 진시황 대에 이르러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단지 칠국(七國)의 국경이 무너진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표준을 정리했다는데 더욱 위대한 공로가 있다. 소통과 이해의 수단인 한자의 통일로 소전(素筌)을 창제했고,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해 광활한 중국에 동일한 신용을 창조했다. 수레의 폭을 일정하게 통일했다는 것은 도로를 정비했다는 뜻이며 군현제의 실시는 말할 것도 없이 통일된 제국을 일사불란하게 통치하고자 했던 표준이다. 진의 표준이 천하의 표준이 됐고, 제국의 모든 영토에 호환성이 생긴 것이다.
만리장성과 병마용(兵馬俑)은 오늘날 유명 관광명소가 됐지만 당시 백성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과 비탄의 소리가 묻힌 것이었을까? 오죽하면 맹강녀(孟姜女)의 슬픈 전설이 전해올까! 만리장성을 쌓기 위해 첫날밤에 붙들려간 남편 만희랑(萬喜郞)을 찾아갔으나 장성 밑에 깔려죽은 남편의 혼과 함께 세상을 하직했다는 맹강녀의 이야기는 중국의 소설, 영화, 노래로 일반 서민에게 익히 알려진 내용이다.
만리장성에는 만 명의 생명이 묻혀 만리장성이 됐다는 가혹하고 슬픈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진시황에 대한 평가는 이미 많이 나왔지만 한나라 문제(文帝) 때 학자인 가의(賈誼, BC200~BC168)의 '과진론(過秦論)'의 다음과 같은 글로 대신한다.
형벌과 법률로는 백성들의 반항을 저지할 수 없으며 방비가 철저한 금성철벽도 정권이 전복되지 않도록 보호하기에는 부족하다. "형법이 번잡하고 관리의 다스림이 모질고 상벌이 부당하며 징세에 절도가 없으면(繁刑嚴誅,吏治刻深,賞罰不當,賦斂無度)" 백성이 반드시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백성이란 지극히 천해도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되며 바보같이 어리석어도 속여서는 안 된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백성과 어긋난 자는 백성이 임금을 이겼다"고 말하면서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사상을 설파했다.
전국시대 후반기에 오면 전쟁이 너무 잦아 나라마다 왕자들을 서로 교환해 휴전(평화)의 담보로 삼는 것을 관례로 했다. 그러나 왕에게 왕자 20여 명은 보통이어서 담보로서는 귀한 가치가 없었다. 훗날 효문왕(孝文王)으로 등극하는 안국군(安國君)의 둘째 아들 자초(子楚)가 조(趙)나라에 인질로 가게 됐는데 진은 조나라를 자주 침범했기 때문에 자초의 위치는 풍전등화였다.
이때 천만금을 가진 큰 장사꾼 여불위(呂不韋)가 나타나 많은 황금을 들여 고독하고 불안한 자초를 안국군이 총애했으나 자식이 없었던 화양(華陽)부인의 눈에 들게 해 효문왕 사후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으니 이가 바로 진시황의 아버지 자초 장양왕(莊襄王)이다.
장양왕은 여불위와의 옛정과 공로를 생각해 그를 승상으로 삼고 문신후(文信候)에 봉했다. 장양왕이 즉위 3년 만에 서거하자 그의 어린 아들이 황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바로 진시황 정(政)이다. 정 또한 여불위를 존중해 상국(相國)으로 삼고 중부라고 불렀다.
문제는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서 여불위와 자초가 의기투합해 진나라 황실에서 실권을 잡을 설계를 세울 때의 일이다. 자초가 여불위의 애첩을 보고 한눈에 반해 탐했다는 설과 여불위가 애첩 조희(趙嬉)가 임신한 것을 숨기고 자초의 첩으로 바쳤는데 그 사이에 탄생한 것이 정(政)이라는 설이다. 이렇게 되면 정은 진 황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여씨 문중의 자손이 된다. 그런데 사마천은 "임신한 것을 숨기고 가서 12개월 만에 아이 정을 낳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산모는 임신 10개월 만에 해산하는 것인데 임신을 숨기고 가서도 12개월이 돼 아이를 낳았다면 이것은 여불위의 아이가 아니라 자초의 자손이고 진나라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이란 뜻이다. 다시 말해 자초에게 시집가서 2개월 후에 임신했다는 뜻이 된다. 기(期)란 12개월을 뜻하기 때문이다.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수립한 한나라로서 진시황의 정통성 문제는 결정적 결함이었기에 진시황이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원했을 터이고 이것이 신왕조의 구왕조에 대한 태도일 것이다. 사마천은 한나라의 관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사관으로서 역사 바로 쓰기를 원했다. 이것은 후대의 지침이 되는 춘추필법 정신을 따른 것이다. 생각하면 얼키설키한 실타래가 풀린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마천의 위대함이다.
2016년 03월 09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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