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고희(古稀)’ 맞은 국내 최초의 ‘공립박물관’(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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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굿모닝 인천(2016. 4)
고희(古稀)’ 맞은 국내 최초의 ‘공립박물관’
/글 조우성 인천시립박물관장 사진 인천시립박물관 제공
문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군가가 씨를 뿌려 싹을 틔우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보살펴 꽃을 피운 후에야 비로소 하늘 높고 푸르른 어느 가을날, 많은 이의 땀과 꿈이 향기롭게 밴 튼실한 열매로 맺는 것이다.
인천시립박물관이 4월 1일, ‘국내 최초의 공립박물관’으로서 개관 70주년을 맞게 된 것도 그와 다를 바 없다. 더불어 인천의 선대 선각자들이 광복 직후의 거친 환경 속에서 이를 일구어 냈다는 점은 자랑할 지역문화의 상징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글 조우성 인천시립박물관장 사진 인천시립박물관 제공
인천시립박물관의 과거와 현재
인천시립박물관 역사의 발원지는 우리나라 미술사학계의 태두인 우현 고유섭 선생이요, 박물관의 씨를 직접 뿌린 이는 석남 이경성 선생이다. 1937년 일본 와세다대 전문부 법률과에 재학 중이던 석남 선생이 법률 공부보다 미술에 심취하게 된 것은 ‘인천의 행운’이었다.
그 무렵, 이경성 선생은 당시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계시던 고유섭 선생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인천 출신으로 동경상대에 유학 중이던 이상래 선생이 우현 선생의 처남이어서 선생이 필요로 하는 책들을 동경 ‘간다’ 서점가에서 찾아 보내드리는 것이 서신 왕래의 계기가 되었다.
“인천에도 박물관이 있어야 한다.”는 우현 선생의 말씀에 깊은 감화를 받은 ‘27세의 청년 미술학도 이경성’은 “고고학에 뜻을 두고 장차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종사하려는 뜻을 굳혔다.”고 훗날의 유저 ‘어느 미술관장의 회고’에서 밝힌 바가 있다. 그 같은 뜻이 가시적으로 실현된 것은 석남 선생의 의지와 함께 당시 인천의 미 군정관이었던 홈펠 중위의 역할도 있었다.
1946년 4월 1일 아침 10시. 마침내 인천 앞바다가 보이는 박물관 회랑(세창양행 사택 자리)에서 개관식이 개최되었다. 이는 인천인들이 타 지역의 손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우리나라 지역 문화계의 신기원을 세운 잊지 못할 역사의 한 장면이 되는 것이다.
비록 준비 기간이 6개월에 지나지 않았지만, 퇴락해 있던 국내 최초의 서양식 건물을 아름답게 꾸몄고, ‘향토관’에 있던 선사 유적과 개화기 유물, 국립중앙박물관 대여 문화재급 유물 19점, 국립민속박물관 대여 민속품 60점, 세관 창고에 쌓여 있던 일본인 몰수품 일부, 골동상 장석구 씨 기증 도자기 19점 등을 수습하였다.
그중에서도 눈여겨볼 것은 일제가 세운 종합 무기 공장인 ‘인천육군조병창’에서 찾아온, 송대·원대·명대에 만들어진 대형 중국 종과 불상들이다. 일제의 공출에 인천까지 끌려 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것도 신묘한 일이고, 오늘까지 인천시립박물관이 보존하게 된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지난해 10월 중국의 신화사 통신이 이 같은 사실을 중국 전역에 대대적으로 보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인천시립박물관은 곧 시련기를 맞았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북한군이 들이닥쳤고, 소장품과 건물을 모두 접수했다. 이때 석남 선생은 소장품을 모두 포장해 옛 시장 관사에 있는 방공호로 옮겼다. 북한군이 그곳도 사용한다며 폐쇄를 명령하자 수위로 있던 김정용 씨의 친척이 사는 송림동으로 유물을 옮겼다. 1·4후퇴 때는 유물들을 기차 편으로 부산에 가져가 국립박물관 임시 사무실에 전달하였다. 덕분에, 인천상륙작전 당시 박물관 건물이 소실되었음에도 국립박물관과 시립박물관의 소장품은 온전히 남아 있게 되었다.
전후, 지금의 제물포구락부 자리에서 재개관한 것은 1953년 4월 1일이었다. 전쟁 통에 물건이 다 없어졌다는 소문은 사라졌다. 그 사이 석남 선생은 서울 미 공보관에서 영사기와 책을 빌려와 박물관에 비치하고 매일 한 차례씩 아래층 창고를 개조한 영사실에서 시민들에게 영화를 보여 주었다.
박물관이 ‘지역 문화의 거점’이라는 ‘신개념 박물관’을 벌써 운영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미술평론가의 길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훗날 우리나라 미술평론가 1세대의 원조가 되기 위한 출발점이기도 했다. 석남 선생은 36세가 되던 1954년에 10년 동안 근무하던 인천시립박물관을 떠났다.
그 후 석남 선생의 활동은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하지만 남들과 달리 줄곧 인천에서 출퇴근을 하였고, 언제 어디서나 자랑스레 ‘인천사람’임을 밝혀 온 ‘인천인’이었다. 아호(雅號)를 당신의 선대가 살았던 고향인 서구 ‘석남동’에서 차용할 만큼 진한 향토애를 지니고 있었다.
인천시립박물관이 비좁은 자유공원 시절을 졸업하고, 연수구 옥련동으로 이전해 간 것은 1990년 5월 4일이었다. 신축 박물관은 현대식 조형미를 뽐냈다. 대지 9천752㎡(2천950평), 연면적 2천690㎡(814평), 전시 면적 800㎡(242평)으로 대폭 늘어났으며, 박물관 직원도 3명에서 20여 명으로 증원되면서 지역사회 최대의 문화거점 공간으로 거듭 성장해 왔다.
또한 ‘한국이민사박물관(중구 북성동)’, 검단선사박물관(서구 원당동)’, ‘송암미술관(남구 학익1동)’ 등 3개 분관과 향후 도시 생활문화사를 담아낼 연수구 신도시 지역의 ‘컴팩스마트시티’ 등으로 규모를 확장하였다.
본관을 비롯한 각 관은 매년 1회 이상의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더불어 다양한 종류의 사회교육 프로그램과 ‘정월대보름맞이 민속한마당’ ‘박물관으로 떠나는 음악여행’을 비롯해 특장사업인 ‘마을박물관 건립 운동’ 등을 속속 진행하고 있다.
또한 유물관리부는 전국 각 박물관에서 의뢰해 오는 각종 유물의 보존처리, 수장고의 관리와 각종 해충 방지 등 박물관 운영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조직 관리와 행정을 맡고 있는 관리부의 능동적인 업무처리 역시 박물관 운영에 큰 힘이 되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작년에 ‘자유공원’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밝혀주는 ‘각국조계 표지석’을 제물포구락부 옆에 건립한 일과, 1946년 개관 후 처음으로 중국 범종 등 유물 5점을 국가문화재로 지정 신청한 일, 지난 3월 17일 문화재청으로부터 ‘문화재발굴조사기관’으로 공인받아 각종 발굴 조사에 능동적으로 임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특기할 일이 또 있다. 지난 1992년 오늘의 인천시립박물관을 있게 한 우리나라 미술사학계의 태두인 우현 고유섭 선생의 동상을 건립해 인천시에 기증한 바 있는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이 지난 4월 1일 개관 70주년을 맞아 초대 관장 석남 이경성 선생의 흉상을 제작해 다시금 시에 헌정한 것이다.
이렇듯, 최초의 공립박물관으로서 ‘고희(古稀)’를 맞은 인천시립박물관은 많은 분의 꿈과 땀이 모아져 가꾸어져 왔던 것이다. 고유섭, 이경성, 유희강, 우문국, 장인식 선생 등 초기 관장들과 유직규 관장을 비롯한 역대 관장과 임직원들, 지용택 운영위원장을 비롯한 역대 운영위원,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묵묵히 업무에 매진해 왔던 110여 명의 박물관 직원들의 헌신은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빛나는 70년사’인 것이다.
앞으로 인천시립박물관은 인천만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가치를 재발견해 내고, 그를 통해 ‘경쟁력 있는 세계 속의 박물관’으로 거듭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2020년 인천에 들어설 ‘국립 세계문자박물관’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며 시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인천 최대의 문화 거점으로 성장할 것을 약속드린다.
초대관장 이경성-박물관장 재직 시절 고유섭
제물포구락부 복관기념(195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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