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선두리(船頭里)(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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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5. 6. 1)
[조우성의 미추홀] 선두리(船頭里)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를 옛날에는 '뱃머리 나루', 곧 '선두포(船頭浦)'라고 했다. 간척사업으로 농경지를 만들기 전까지의 포구를 그렇게 불렀다. 광복 직후인 1947년, 세계적인 인류학자인 미국 예일대 '코넬리어스 오스굿' 교수도 이 지역을 '선두포'라 지칭했다.
▶생전에 아시아 통으로 알려졌던 그는 일본을 한번도 방문한 바 없이 '국화와 칼'을 쓴 베네딕트와는 달리 현장에 직접 가 조사 연구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국인과 그들의 문화'(조건호 번역. 인천시역사자료관 간)에서 오스굿은 연구지로 선두포를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강화도 농경 마을의 생활에 대해 연구한 제1장은 현재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전형을 나타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선택되었다" 광복 직후만 해도 전 인구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던 사정을 감안한다면 오스굿의 견해에 대해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예일 대와 피바디 자연사박물관의 연구조사 프로그램의 하나로 진행된 선두포 연구에 도움을 준 한국인은 전 국립박물관 관장이었던 김채원 박사와 1947년 여름 내내 연구 팀에게 친절하게 숙식을 제공해 주었던 김영섭 전등사 주지 스님과 김우식, 한표규 학생 등이었다.
▶오스굿은 '선두포'란 지명이 "마을사람 대부분이 해안가에 살며, 작은 배를 해변에 놓아두고 살았기에 생기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나름대로 풀이하면서, "마을에는 28채의 초가집이 있으며 169명이 산다. 배와 어망을 해변에 보관하고 있는 모습이 다른 마을과는 다르다."고 전한다.
▶인류학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해 아시아의 벽지였을 선두포의 가옥 형태, 사회의 구조와 성씨 분포, 마을의 경제, 떠돌이 장사꾼의 방문, 농작물 수확, 세시풍속, 관혼상제 등 우리가 잊고 지내왔던 원형적 삶을 세계에 생생하게 전해 주었다는 점에서 고마움을 느낀다.
▶그 선두포, 선두리가 최근 국토교통부 주최 '2015 대한민국 경관대상'에서 농산어촌 경관 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주민들께 축하를 드릴 일이라 생각한다. 기왕이면, '오스굿'이 전해 주고 있는 과거를 재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인천시립박물관장
2015년 06월 01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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