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메르스 패닉'(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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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5. 6. 9)
[조우성의 미추홀] '메르스 패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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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개항 직후 인천에는 근대식 진료를 할 수 있는 의사가 없었다. 급성환자나 중환자가 발생할 경우, 관에 의사를 요청하면 서울에서 인천까지 오는 데만 대충 36시간이 소요되었고, 경환자의 경우 서울가는 마차를 구하는 데 4, 5일이 걸려 병세가 악화되기 일쑤였다.
▶마차 삯도 7, 8원이나 돼 박봉인 사람은 어려움이 더 컸다. 그래서 대안으로 마련했던 것이 당시 인천항에 정박하던 일본 군함 승선 군의관의 왕진 요청이었다. 하지만 환자가 늘어 그도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1993년 9월 군의관이 파견되어 온 것이 근대 의료의 시작이었다.
▶의료 선교사 랜디스가 인천에 도착한 것은 1890년이었다. 랜디스는 고르페 주교와 함께 지금의 중구 송학동에 10명이 동시에 입원할 수 있는 성누가병원을 개설하고 진료에 힘써 명성을 얻었다. 따듯한 인간애와 의술에 감복해 사람들은 그를 '약대인(藥大人)'이라 칭했다.
▶의료 활동과 더불어 고아원을 운영하고, 영어야학교를 여는 등 온몸으로 인천에 헌신했던 랜디스는 안타깝게도 1898년 4월 3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부터 서양 의료의 세례를 받은 인천에는 '제생당'과 화평당' 같은 제약사가 생겨소화제와 감기약 등을 팔았다.
▶그러나 1899년 8월 정부가 '전염병 예방 규칙'을 공포하기는 했지만, 아직 전염병에는 속수무책이었다. 1909년 9월 인천에서만 47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해 17명이 목숨을 잃었다. 거의 매해 전염병이 돌자 인천부는 전염병 전문 병원 '덕생원'을 현 도원동으로 확장 이전하기도 했다.
▶국내 최대의 전염병 창궐은 1946년 6월에 있었다. 그 달 15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전국의 콜레라 발생 지역은 35개소, 529명의 환자 중 171명이 사망했다. 사망자는 부산이 가장 많아 67명, 전북 부안 22명, 목포 16명 등이었고, 서울 3명, 인천 2명 순이었다.
▶온 나라가 중동발 전염병으로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다. 전염 속도가 의외로 빠르기는 하지만, 사망률보다는 '메르스 패닉'이 더 큰 문제로 보인다. 복지부와 서울시장의 공방도 점입가경이다. 우리 사회체제가 이렇게 허약한가도 되돌아보게 된다.
/인천시립박물관장
2015년 06월 09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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