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지용택(56회) 칼럼/단재 신채호를 생각한다(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5. 6.10)
[지용택 칼럼] 단재 신채호를 생각한다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 단재 신채호 동상.
육십 평생을 한결같이 나라를 위하여 분골쇄신(粉骨碎身)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9) 선생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며 온다. 신채호 선생은 일제 치하 일본에 붙어 민족혼을 말살하려는 세력에 맞서 피를 토하는 정론으로 뜻 있는 사람들을 일깨우고 올곧은 정신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온 몸을 던져 투쟁하다 대만에서 체포되어 다롄(大連) 법원을 거쳐 뤼순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선생이 남긴 글은 하도 방대해서 지금까지 후학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낭객(浪客)의 신년만필(新年漫筆)>은 현재의 우리들에게 커다란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우리 조선은…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고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통곡하려 한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고 민족혼마저 잠식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만리타국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 민족의 혼과 정신을 되살릴 수 있을까 불철주야 노력하던 단재의 눈에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사람들마저 좌와 우로 분열되어 서로 자신의 주의 주장만 옳다고 싸우고 있는 모습은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독립이란 스스로 제 발로 서는 일인데, 그마저도 외세의 주의주장에 의존하는 안일한 세력에 가한 일침이었다.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중국에는 선불교(仙佛敎)의 전통이 있다. 남인도에서 건너온 보리달마(菩提達磨, ?~536)가 숭산(崇山) 소림사(少林寺) 뒷산에서 면벽 좌선(面壁坐禪) 9년 만에 득도하여 중국 선사상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출중한 제자가 혜성처럼 나타나니 달마에 이어 2조 혜가(慧可, 487~593), 3조 승찬(僧璨, ?~606), 4조 도신(道信, 580~651), 5조 홍인(弘忍, 601~674)으로 승계되어 6조 혜능(慧能, 638~713)에 이르러 중국 선종은 화려한 정신문화의 꽃을 피운다.
흔히 선불교의 중심은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이심전심(以心傳心)에 있다고 한다. 중국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문자의 대국이었다. 그런데 문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불립문자이다. 이 말의 의미는 스승이 부처님 말씀을 제자에게 깨닫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합천 해인사에 있는 대장경 8만4000의 법문도 이심전심이 아니면 뜻이 바르게 전달될 수 없게 된다. 선불교에서 경(經)은 부처님 말씀이고, 선(禪)은 곧 부처님의 마음이다. 그런데 육조 혜능의 언행록을 <육조단경(六祖檀經> 이라고 칭하니 이것은 곧 혜능을 부처님 반열에 오르게 한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부처님 말씀 즉 법문만을 역사적으로 경이라 해왔기 때문이다.
중국은 달마에서 혜능까지 6조, 200여년에 걸쳐 인도 불교를 중국의 선사상으로 승화시켜 인도 불교는 중국 불교가 되었다. 절대적 도그마인 종교마저도 흡수하여 중국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지엄한 역사적 사실은 중국의 그 놀라운 흡인력에 찬탄을 보내기에 앞서 외세의 힘과 사상을 수용하다 못해 그에 몰입되어 버리는 우리 슬픈 자신을 성찰하게 만든다.
선을 추구하는 큰 스님들은 생각은 높게 추구하면서도 생활은 항시 뿌리가 깊은 낮은 곳에서 행동으로 답을 찾아 실천하는데 한 번쯤은 그분들의 선문답(禪門答)을 음미하고 싶다.
이백, 두보와 함께 당나라 삼대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백거이(白居易, 772~846)는 대대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의 시는 서민의 애환을 대중들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표현하여 그가 살아있을 때 이미 소를 모는 목동이나 말몰이꾼 같은 이들조차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노래로 불렸다고 한다.
노년에 그는 특히 불교에 심취하여 선불교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다. 아마도 다음 이야기는 그가 아직 젊었을 때의 일이리라. 백거이가 항주 자사(抗州 刺史)로 있을 때 도력이 높기로 소문난 선승 조과 도림( 741~824)을 찾았다.
조과 선사는 외딴 숲에 풀로 엮은 암자를 짓고, 높이 솟은 나무 위에 둥지를 틀어 그 위에서 정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정진하고 있는 동안에는 새들이 날아와 그 옆에 둥지를 틀고 스님과 함께 이웃을 삼았다. 어느날 백거이가 선사를 찾아갔는데, 때마침 선사는 나무 위에서 좌선을 하고 있었다.
"큰 스님, 계신 곳이 위태로워 보입니다. 괜찮으신지요?"
"여기는 안전한데 도리어 태수(太守)가 있는 곳이 위험이 깊습니다."
백거이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제자는 땅을 굳게 딛고 관직에 있는데 어찌 위험하다 하십니까?"
선사는 매우 온화한 얼굴로 대답했다. "주위는 장작으로 가득 차있고 불이 붙어 타오르는 것처럼 의식과 정성(情性)이 잠시도 머물지 않으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소."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 가르침을 주시지요."
선사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좋은 일을 많이 받들어 행하시오(諸惡莫作 衆善奉行)."
백거이가 곧이어 대답했다. "그런 것쯤이야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도 알겠습니다. 그것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러자 선사는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말했다. "세 살 먹은 아이도 말하기는 쉽지만 여든이나 된 노인도 실행하기는 어려운 일이오(三歲孩兒雖道得 八十老人行不得)."
백거이는 이때 선사의 가르침으로부터 섬광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에 전해지고 있다.
모든 문제는 현실에서 발생하고, 모든 진리도 현실에 있고, 그에 따른 해법도 현실에 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사는 삶의 주변, 일상에서 시작한다. 선(禪)과 도(道), 덕(德)과 진리, 정의는 저 멀리 어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근대란 외국의 현실에 눈이 어두워 결국 국권을 빼앗기고 나라 없는 민족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외국의 선진문물을 배워 잘 사는 선진국이 되는 것만을 목적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잃고, 역사와 사람과 환경이 전혀 다른 곳에서 생성된 사상이나 제도를 신주(神主)단지 모시듯 해서는 국권을 회복했더라도 정신은 노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된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든, 학문을 하는 사람이든 스스로를 돌아보면 과오가 있는 법이다. 성공하는 사람은 남의 실수에서 배우고, 실패하는 사람은 나의 과오에서도 절실한 느낌이 일지 않는 법이다.
나의 실수와 실패를 좌파니, 우파니, 진보니, 보수니, 또는 앞선 다른 사람들에게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저질렀던 병역기피, 전관예우, 위장전입, 부동산투기 그리고 공자도 미워한 향원(鄕原 , <논어> '양화(陽貨)'편)같은 사람인가, 스스로 성찰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위정자만이 진정한 시민의 지도자라 할 수 있다.
2015년 06월 10일 수요일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