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나채훈(65회)의 개항장과 중국/1912년, 공화춘… 오늘(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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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기호일보(15. 4. 7)
1912년, 공화춘… 오늘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장/역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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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장/역사소설가
인천 중구에 있는 차이나타운 130여 년 역사에서 손꼽을 만한 노포(老鋪)는 없으나 공화춘(共和春)이라는 중국 식당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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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요릿집으로 오랫동안 명성을 날린 이유도 있겠고, 최근에 조성된 짜장면박물관의 터였다는 점도 작용했겠지요. 더하여 위치와 주인은 달라졌으나 차이나타운의 맛집으로 성업 중인 지금의 업소 역시 한몫 거들었을 겁니다. 아무튼 이 명칭이 잊혀지지 않고 있다는 건 나름대로 의미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새겨 볼 만한 탄생 배경과 얽혀 있는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공화춘은 생겨날 때부터 사연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1912년 당시 산동회관이라는 객잔을 운영하고 있던 우(禹)씨는 본토에서 청나라가 무너지고 원세개가 공화정을 선포했다는 소식에 크게 감격한 것입니다.
만주족의 황제가 아니라 ‘백성이 주인이 되는 체제’는 정말 감격스러운 일이었겠지요. 우 씨는 ‘공화정 만세’, ‘원세개 만세’를 외치고 점포명을 ‘공화춘(共和春: 공화정이 들어선 봄날)’으로 바꿔서 신장개업하는 것입니다.
물론 공화정 만세는 이해가 됩니다만, 원세개 만세는 이해가 안 되지요. 1882년 임오군란의 혼란한 틈새에 인천을 통해 조선 땅에 들어온 그는 참으로 못된 인간이었습니다.
고종 임금의 수라상을 발로 걷어차는 만행은 물론, 인천 전환국에서 만든 동전에 대조선(大朝鮮)이란 문구가 있다고 펄펄 뛰어 끝내 유통을 중단시키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 그 자의 못된 짓거리를 모아 놓는다면 책 몇 권은 실히 될 겁니다.
23세란 약관에 조선 땅에 와서 얼마 후에 주한총리(駐韓總理)가 된 그는 당시에 인천의 중국인 거류지에서 일본인과 상전(商戰)을 벌이던 중국인들에게는 외교적으로 군사적으로 수호자 역할을 했으니 우리 입장에서는 욕할지 모르나 중국인 입장에서는 받들 만했겠지요. 원래부터 음험하고 계략에 뛰어나며 작은 이익만 있으면 배신을 일삼는 낯가죽이 두껍고(厚), 심보는 시커먼(黑) 후흑의 달인이었으니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우리와 상당 부분 비슷한 궤적을 그린 근대사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원세개란 인물은 실상 형편없는 도적놈이란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노자(老子) 연구의 일인자로 꼽히는 강남대학의 야오간밍 교수는 ‘권력에 미친 도적놈’이라고 간단히 원세개를 정리하면서 1912년 성도(成都)의 ‘공론일보(共論日報)’에 발표돼 센세이션을 일으킨 리쫑우의 후흑학을 예로 들었습니다.
1912년은 바로 중국 대륙에서 역사상 보기 드문 대변혁이 일어난 해입니다. 공화시대가 됐고, 새로운 정치실험은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그때 리쫑우는 삼국지 영웅들의 성공 비결을 예로 들면서 “후흑의 이치를 철저히 익히면 인생의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나쁜 짓을 장려하는 고약한 주장이라고 욕하기도 했습니다만, 리쫑우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제가 말하는 낯이 두껍고(厚), 속이 시커먼(黑) 인물이 출세한다는 건 현실을 풍자한 것입니다. 그리고 탐관오리들이 흉악한 짓을 일삼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후흑의 이론에 기초해서 정치, 경제, 외교 등을 개선하고자 한 것입니다.” 결국 이 시기의 대표적인 탐관오리이자 정치적 영향력을 못된 일에 쏟은 원세개를 겨냥했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인 것입니다.
아무튼 차이나타운의 공화춘은 원세개란 인물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이러이러한 이야기와 연결된다는 걸 보여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즘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재외공관장회의에서 미·중 관련 외교 성과를 자화자찬하자 대다수 언론이 정세 인식에 있어 심각하다고 우려를 표하고 있지요.
즉, ‘미국과 중국 양측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상황은 축복이 아니라 19세기 말 망국(亡國)의 역사를 되풀이할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겁니다. 인천의 차이나타운에는 영욕의 구한말 역사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공화춘은 그 중 하나의 이야기를 전할 뿐이지요. 분명한 건 우리의 지정학적 몸값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뼈아픈 교훈 없이 그저 몰려오는 중국 관광객이나 수도권의 상춘객들에게 중국요리 몇 접시 더 파는 데 목을 걸어서야 되겠느냐는 말씀을 정중히 드리고 싶을 따름입니다.
2015년 04월 07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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