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나채훈(65회)의 개항장과 중국/관우와 호설암, 그리고 의선당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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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기호일보(15. 5. 5)
관우와 호설암, 그리고 의선당
나채훈/삼국지리더십연구소장/역사소설가
인천시 중구의 차이나타운은 짜장면으로 상징되는 중국요리를 먹고, 중국문화의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정도의 간단한 지역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구한말 아픈 우리 역사의 상흔과 함께 중국에서 이주한 화교들 나름의 상도(商道)와 세상관(世上觀)이 바탕에 흐르고 있으며, 중국에서 재신(財神)으로 일컬어지는 두 사람,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 관우(關羽)와 청 말기의 홍정상인(상인에게 주어지는 최고 관직) 호설암(胡雪岩)의 ‘보국(報國)과 우민(憂民)’의 정신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화교사회가 인천의 개항 이듬해인 1884년에 이뤄진 청국조계지(오늘의 차이나타운 일대) 설정 후 본격화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에 들어온 화교들 대다수가 산동지방 출신들로 화교사회의 구성인 90% 이상이 산동인으로 돼 있고, 공화춘이 본래 산동회관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사실에서 이런 점들을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입니다.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 인천에 첫발을 디딘 화교의 출발이 임오군란(1882년) 때문에 들어온 청국의 오장경 휘하 부대에 편승한 남방쪽 상인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청국조정과 북양대신 이홍장의 비호를 받는 광동성과 절강성 출신 40여 명의 군역상인(군대 또는 군인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인천의 청국지계에 자리잡고 수도 서울을 오가는 한강의 기선운항권을 비롯해 세곡운송권까지 부여받았던 거상 동순태(同順泰)는 대표적인 남방(광동성) 상인이었습니다.
그때 동순태의 자본력은 대략 은화 200만~300만 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액수는 당시의 청국 쪽에 매관매직이 꽤 퍼져 있었는데 관리 입신에 500량이 필요했다는 점에 비춰 보면 엄청난 거금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거액의 자본력을 앞세우고 이땅에 들어온 그들이 이익을 얻기 위해 분주했을 것임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중국에서는 본래 ‘상인들이란 날카로운 안목으로 매사를 저울질하고 이익이 있으면 물불을 안 가리는 집단이자, 권세에 빌붙고 배신과 모략쯤은 밥 먹듯 하는 자들’이란 인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상인을 멸시하는 풍조가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편전쟁에서 패전하고 태평천국의 난을 겪으며 남방의 상인들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 선두에 호설암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맨주먹으로 수천만 량의 자본력을 갖게 된 청국 최고의 갑부는 항상 이런 말을 주위의 상인들에게 했습니다. “관직에 오르든 장사를 하든 모두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다.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겠지만 동시에 천하 백성들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관리는 탐관오리가 되고 상인은 간상배가 된다.
그래가지고는 어떤 일을 하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여기서 자극을 받은 그들은 어떤 일을 하든 의롭게 행동하고 착한 마음을 갖는 인생관을 소중히 여기게 됐다고 합니다. 남방 상인들이 이런 호설암에게 진정한 상인의 길을 제시한 ‘상신(商神)’이자 ‘살아있는 재신’으로 추앙하며 존경의 뜻을 밝히지요.
살아있는 재신이라 한 것은 ‘죽은 재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관우입니다. 관우는 피혁업이나 음식업, 두부업, 이발업, 교육업 등 22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를 직업의 보호신이자 재신으로 추앙해 왔습니다.
그 전통은 1천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형성돼 온 일종의 종교이지요. 차이나타운에 중국인들이 세운 의선당(義善堂)은 관우를 비롯한 여러 인물을 모시고 있는데 중요한 부분이 관우였습니다.
요즘은 그리 흔하지 않지만 차이나타운 음식점의 벽면에 관우상이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붉은 얼굴에 긴 수염(그는 미염공이란 칭호도 있다.) 그리고 번쩍이는 천룡언월도 모습이 음식의 미각을 돋우는 기능을 할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착하고 바르게 살자’는 화교들의 정신이 일제시대 차이나타운의 의선당 건립으로 나타난 것은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은 것입니다. 호설암과 관우, 그리고 의선당은 우리로 하여금 차이나타운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가오는 1천만 명 중국 관광객 시대에 그들의 정신적 유산이 지켜지고 있는 차이나타운의 모습은 꽤 의미있는 변화로 받아들여지리라 봅니다.
2015년 05월 05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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