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이경종(53회) 기고/6·25참전기념관 많이 찾아주길(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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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4.12. 9)
기 고-6·25참전기념관 많이 찾아주길
/이경종 인천학생 6·25참전관관장
금년 80세인 필자는 인천상업중학교(현 상인中, 인천高 전신) 3학년 때 16세의 나이로, 6·25 전쟁으로 고향 인천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했을 때 남하했다. 그리고 육군에 입대하고 각종 전투에 참전, 전쟁터에서 만 4년을 보낸 후 군에서 제대하여 스무 살 제대군인이 되었다.
내가 제대했을 무렵 우리 집 형편이 어려워 복학을 못하고 그대로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부모님 슬하에서 편안히 공부하고 있는 내 친구들을 보면서 '내가 왜 바보처럼 군대에 갔지?'라고 후회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너희들이 집에서 편안히 공부하고 있을 때 나는 전쟁터에서 나라를 지켰지"하면서 스스로를 달래며 살아왔다. 이렇듯 전쟁 때문에 공부할 시기를 놓치고 살아온 나는 배우지 못한 한(恨)을 품고 살았으며,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60고배를 넘게 되었다.
평생 배우지 못한 설움을 안고 살아온 나는 항상 "내가 왜 어린 나이에 군인이 돼야 했는지" 그리고 "꼭 군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면 그 의미가 있었을 텐데"하는 것이 자신에게 묻는 내 인생의 물음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치과의사인 아들을 불러 앉히고 김영삼 대통령이 준 <6·25 참전용사 증서>를 보이며 아버지가 살아온 6·25 때 전쟁 이야기와 인천학도의용대와 관계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야기 끝에 6·25 당시 인천학도의용대에 관계된 지휘부나 선배들은 어째서 기록을 남기지 않았는지 하는 이야기도 들려주게 되었다. 한참 듣고 있던 아들은 "아버지, 인천 학생들의 6·25 참전 역사를 제가 찾겠습니다"라며 시작이 1996년 9월 15일이며 이때부터 명칭을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로 구성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이렇게 아들과 같이 그동안 찾아낸 성과물은 상당량에 이르나, 극복을 요하는 한계에 다다랐을 때는 내가 왜 아들에게까지 이러한 일을 하게 했나 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그 어렵던 역사찾기를 시작한지도 어언 18년의 세월이 흘렀으며 난관을 극복하고 지금쯤 지나온 일들을 한번 짚어봄으로서 후대 학생들에게 전해 줌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필을 들었다.
그 동안 6·25 때 인천학도의용대의 규모, 활동내용, 남하한 후 참전과정, 3000여명이 군에 입대, 208명의 전사자와 그 전사자 중에는 필자와 같이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동기-양순혁, 김윤수, 임익순, 김세구를 찾았으며 또한 ○○중학교 14세 2학년생인 조순범도 찾아내는 등의 중요한 내용을 밝혔다.
6·25 때 인천학도의용대를 따라 입대한 학생들 중에는 14세 중학교 2학년 학생들도 다수 있었으며 그들 중 인천상업중학교 2학년생인 허상 학생은 인천학도의용대 주안지대원으로 남하, 형들을 따라 군에 입대 후 강원도 전투에서 부상당해 상이제대했다.
또한 6·25 당시 인천상업중학교 밴드부는 인천 학도의용대 군악대로 남하, 당시 부산 동래에 있었던 육군종합학교 군악대 창설요원이 되었으며 이때 14세 2학년 학생들도 몇 명 있었다. 그동안 역사 찾는 과정에서 개인 묘지에 묻혀 있던 김우종, 송용식 전사자 묘지 이장 사업도 했다.
현재 이러한 모든 내용이 담긴 인천학생 6·25참전 기념관이 아들의 도움으로 인천 중구 신포시장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앞으로 더 생생한 내용을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 남길 것을 약속드린다.
2014년 12월 09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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