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지용택(56회) 칼럼/새얼문화재단 제26차 중국역사기행(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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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4.12.10)
새얼문화재단 제26차 중국역사기행
석가의 조선 아닌 '조선의 석가' 위해 나는 통곡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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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 1924년 6월 16일 황푸군관학교 개교식에서 쑨원 선생이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새얼문화재단
▲ 1923년 광저우에서 장제스.
광저우에서 장제스.
▲ 2014년 황푸군관학교에 붙어 있는 중국몽, 강군몽 표어.
■ 강주아오대교
홍콩 - 주하이·마카오 잇는 세계 최장 해양대교
대만·양안 통일 위한 포석
■ 황푸군관학교
국공합작 상징물 1924년 6월 개교 초대교장 장제스
국민·공산당 청년핵심지도자로 성장
韓 130여명 입학 혁명군인회 결성
■ 귀국길 오르며
과거 지도자 무능 병자호란까지 초래
동서양 강대국 사이 대한민국의 현주소
남·북한 대화 물꼬 스스로 개척했으면
새얼문화재단 제26차 중국역사기행은 광둥성(廣東省) 북부 소관(韶關)을 비롯하여 영서봉림(英西峰林), 동천선경(洞天仙境), 광동대협곡(廣東大峽谷), 남화선사(南華禪寺), 단하산(丹霞山), 불산(佛山) 그리고 마카오(澳門)와 홍콩(香港) 공항을 거쳐 귀국하는 일정으로 꾸려졌다.
▲양안 통일의 초석을 놓는 강주아오대교(港珠澳大橋)
랴오닝성(遼寧省)의 작은 도시 티에링시(鐵嶺市)는 부동산 거품경제가 꺼지면서 유령도시가 되어가고, 이러한 현상이 이곳뿐만 아니라 중국의 여러 곳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기사를 얼마 전에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이번에 광둥성 북부의 벽촌에 다다랐을 때 내가 본 광경은 새롭게 길을 포장하고, 관광 개발에 적극적으로 힘쓰는 건설 모습이 예전과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특히 광저우 남쪽 지역에는 대형트럭들이 주하이(珠海)와 마카오·홍콩을 바쁘게 오가며 노동자들이 먼지와 뒤엉켜 씨름하며 열심히 일하는 강주아오대교(港珠澳大橋) 건설 공사 현장은 장관이었다. 강주아오대교는 홍콩과 주하이·마카오를 연결하는 세계 최장의 해양대교로 총길이 50㎞에 해저터널만 6.7㎞, 인공섬 등 총공사비 RMB 720억(한화 13조)에 달하는 대공사로 2016년쯤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대교의 건설목적은 홍콩과 주하이·마카오를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다. 이 지역은 중국 대운하의 남부 시발지이며 아편전쟁이 최초로 발발한 지역으로 운하무역과 해상무역의 근거지인 주강삼각지(珠江三角地)를 세계 경제의 중심지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것이 중국 정부가 내걸고 있는 목표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진짜 속내 중 하나는 과거 영국과 포르투갈이 백년 이상 지배했던 영토를 대륙의 품속으로 끌어안고, 대만과 양안 통일의 초석을 놓는 먼 미래까지 내다보고 있는 정치적 포석이자 선진적 비전이라는 사실이 부럽기 그지없다.
이 계획 자체는 1983년 중국계 홍콩 상인들에 의해 작성된 기획 문서를 바탕으로 중국 정부가 그동안 광둥성 내의 광저우(廣州), 선전 , 주하이, 산터우(汕頭) 중산(中山), 퍼산(佛山) 등 여러 도시들이 경제개발 계획에 따라 발전하는 것을 지켜보고 실행에 옮긴 사업이라고 한다. 아무리 세계 최장의 해양대교를 건설하는 대규모 토목사업이라고 하지만, 경제·지리·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제대로 된 위치를 찾기 위해 30년이란 긴 세월을 검토하고 판단해 대업을 일으키는 장기적인 안목은 우리가 배워야만 할 일이다.
▲황푸군관학교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
광저우에서 주하이 강을 건너면 황푸장주도라는 작은 섬이 있는데, 이곳에서 1924년 6월16일 황푸군관학교가 처음 문을 열었다. 중국 곳곳에서 젊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함께 공부하고, 장차 중국혁명군의 초석이 되었던 곳이다. 우리가 특별히 이곳을 찾아간 이유는 상해임시정부 요인의 추천으로 입학한 한국 청년들 때문이었다. 비록 그 수는 정확히 알 수 없다지만 현재까지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했던 것으로 밝혀진 우리나라 사람만 해도 130여명에 이른다. 피 끓는 가슴과 조국해방에 대한 일념으로 이역만리 머나먼 땅에서 입학을 원한 사람들의 열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이 청년들 가운데 많은 수가 조선과 중국의 이중국적을 소지한 사람들이었고,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가명을 사용했으며, 주소 역시 지린성,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등으로 기재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신상파악이 퍽 어려운 상황이다.
이 학교 4기 생인 김원봉(金元鳳, 1898~1958)과 김성숙(金星淑, 1898~1969)은 황푸군관학교 교장 장제스(蔣介石, 1887~1975)를 만나 한국인의 입학 및 학비 면제를 약속받았다. 한국인 학생과 교관들은 혁명군인회(革命軍人會)라는 독자적인 조직을 결성하여 교장 장제스의 양해 하에 광둥·우한 지역의 독립운동세력과 연계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주·노령 지역을 무대로 비밀리에 입교생 모집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장제스 일기에 따르면 초기 6개월 정도의 과정만을 거친 학생들이 전선에 나가 그중 반 이상이 전사했다고 가슴 아파하는 기록이 있으니 그 가운데 우리 젊은이들은 또 얼마나 되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참으로 거룩하면서도 애통한 일이다. 그러나 군관학교 학생들보다 개인자격으로 북벌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더욱더 많았다. 그런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비가 광저우시 웨슈공원에 있지만, 국내에는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 많지 않다.
▲국공(國共)양당 뿌리는 하나, 황푸군관학교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한 소련은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었다. 위기를 느낀 소비에트 정권은 강대국으로부터 고통 받던 인접 국가들과의 제휴를 모색하면서 1918년 7월25일 대중국선언(對中國宣言)을 발표했다. "러시아제국 시절 중국과 체결한 모든 불평등조약을 파기하고 만주를 비롯한 모든 지역에서 취했던 이권을 일괄적으로 포기한다"는 내용이었다. 종이 한 장에 불과한 선언서였지만, 이것이 중국에 미친 영향은 상상 이상이었다. 수많은 중국인들이 감격하였고, 중국 대륙에 대대적인 친소(親蘇) 바람이 불어 닥쳐 대학마다 경쟁하듯 러시아학과와 관련 연구기관들이 개설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코민테른이 보낸 네덜란드 출신 마린(馬林)의 도움을 받아 1921년 <SPAN style="FONT-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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