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원현린(75회) 칼럼/사마천(司馬遷)이 자살하지 않은 이유 (퍼온글)
본문
퍼온곳 : 기호일보(14.10.27)
사마천(司馬遷)이 자살하지 않은 이유
/원현린 논설실장
사마천(司馬遷)은 한(漢)나라 태사령(太史令)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났다. 어려서부터 전적(典籍)을 가까이 하며 한나라 전역을 주유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사적(史蹟)을 견학했다. 그는 자라면서 역사가로서 소양을 쌓아갔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한무제(漢武帝)는 한실 최초의 봉선(封禪)의 예(禮)를 태산에서 행했는데, 사마담은 기록을 맡은 태사령인데도 무제가 봉선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자 분사(憤死)했다.
사마담은 죽기 직전 태사령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기록을 행하지 못하고 죽는 원통함을 아들 천에게 호소하며 상고(上古) 이래의 역사를 쓰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때 천의 나이 36세였다.
그는 아버지에게 “소자 불민하오나 아버님께서 하시던 일의 경위와 구문(舊聞)을 남김없이 논술하여 조금도 결여된 부분이 없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선친의 유언을 실천에 옮길 것을 맹세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에 임명된 사마천은 「사기(史記)」 저술에 착수했다. 그러던 중 천한(天漢) 2년(기원전 99년) 이사장군 이광리를 따라서 흉노 정벌에 나섰던 이릉(李陵)이 흉노의 포로가 돼 한(漢)의 위상을 크게 손상시켰다. 이릉은 뛰어난 장수였는데도 불과 5천의 보병으로 흉노 토벌에 나섰다가 기마부대를 주력으로 하는 8만 병력의 흉노에게 포위돼 어쩔 수가 없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패전으로 나라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이릉을 처벌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사마천은 무제의 심중을 살피지 않고 이릉을 변호했다.
결국 무제의 격노를 사서 하옥되고 죽음보다 더한 궁형(宮刑)에 처해졌다. 억울함의 한을 품은 채 사마천은 「사기」의 저술에 몰두해 무제 정화(征和) 2년(기원전 91년)에 글자 수가 무려 52만6천500자에 달하는 방대한 사서를 완성했다.
사마천의 역사서를 완성해야겠다는 강한 불굴의 의지는 그의 친구 임안(任安)과 주고받은 서신에 나타나 있다. “나는 겁이 많고 마음이 약해서 조금이라도 목숨을 더 연장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출처진퇴(出處進退)의 분수는 알고 있습니다.
어찌 뇌옥(牢獄)에 갇히는 치욕 속에 그저 빠져 있을 수만 있겠습니까? 미천한 노복(奴僕)이라도 자결하고자 할 것입니다. 더구나 궁지에 몰린 내가 자결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은인(隱忍)하며 살아남아 분토(糞土) 속에 갇힌 것 같은 지금의 처지를 참고 있는 것은 마음속에 맹세한 일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고 이대로 죽어서는 내 문장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까 애석(哀惜)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궁형은 남자에게 있어 죽음보다 더 잔혹한 극형이라 할 수 있다. 서신 문장에 나타나 있지만 사마천은 궁형을 받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해야 하나 아버지의 유언을 넘어 역사서를 완성해 후대에 전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의 발로로 삶을 택한 것이다.
사마천에 있어 궁형이라는 극한의 담금질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사기」는 기술되지 못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자살하려는 마음을 돌려 생에 대한 의지를 불태워 「사기」라는 역사서로 승화시킨 것이다.
청소년들의 자살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소식이다. 청소년 자살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특히 한창 나이에 생을 달리하는 학생들의 자살이 늘고 있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청소년 자살 동기가 성적 비관, 가정문제, 이성관계, 우울증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목숨을 끊는 학생 10명 중 7명꼴은 자살하기 전 학생 상담기관인 ‘Wee클래스’에서 상담받은 경험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돼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오죽하면 자살하겠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생명의 무게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된다.
청소년 자살이 줄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살을 생각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가혹한 형벌인 궁형을 당하는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아 불후의 사서(史書) 「사기」를 완성해 청사(靑史)에 크게 이름을 남긴 위대한 역사가 거인(巨人) 사마천의 약전(略傳)을 인용해 봤다.
2014년 10월 27일 (월)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