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전단(傳單)'(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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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4.10.13)
조우성의 미추홀 - '전단(傳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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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1월 13일, 기상 악화 등으로 미루던 '안창남 고국 방문 대비행' 행사의 하나인 '인천 방문'이 이뤄졌다. 11분간 경성의 추억어린 이곳저곳을 3·4회 돌고, 이미 해가 저물기 시작했지만, 그는 인천시민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4시24분 기수를 서쪽으로 돌려 잡았다.
▶십여 분이면 족할 길을 남침판도 없이 15분간 날았을 때는 불안한 마음이 잠시 스치기도 했지만, 곧 구름 아래서 인천 시가지를 발견하고, "오, 인천!"이라며 그는 혼자 기뻐 크게 소리쳤다. 당시의 잡지 '개벽'에 기고한 수필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에서 밝힌내용이다.
▶인천시민들은 웃터골 인천공설운동장에 모여 불꽃 3발을 쏟아 올리며 비행사 안창남을 맞았고, 그는 200m 상공을 나는 저공비행과 여러 가지 '고등 비행술'을 선보여 시민들을 열광하게 했다. 그때 안창남 비행사는 시가지 상공을 두 번 돌면서 가지고 온 '종이'를 뿌렸다.
▶그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었는지는 밝혀진 바 없으나, 미루어 짐작하건대 대한 남아로서의 기상과 민족혼의 부흥을 말하지 않았을까 싶다. 설령 그것이 '백지(白紙) 삐라'였다 해도 그에 적힌 안창남의 마음은 그러했으리라 믿는다. 그것은 분명 한국인이 뿌린 최초의 '공중 삐라'였다.
▶한국의 '삐라'사(史)는 그렇게 시작되었지만, 6·25전쟁 중의 '삐라'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적군에 대한 피아의 치열한 선전전(宣傳戰)이 거의 전부였다. 귀순 종용, 전의 상실유도 등이 그 내용이었다. 전후에는 L-19기(機)가 주로 떠서 체제 선전 '삐라'를 수시로 뿌렸다.
▶'삐라 살포'는 심리전 가운데서 효과가 가장 크다고 여겨 '종이 폭탄'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는데, 남북이 뿌린 삐라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때 살포한 삐라 중에 신종이 수집가들에게 의해 종종 찾아지고 있고, 탈북 단체들이 이를 계속해서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전단 풍선'에 고사총을 쏘고, 아군이 그에 응사하면서 '종이 폭탄 전쟁'을 다시금 실감하게 됐다. 우리가 '휴전중(休戰中)'이라는 냉엄한 현실도 재삼 일깨워주었다. 그간 달라진 게 있다면, 일본식 명칭인 '삐라'를 '전단'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는 점뿐이다.
/주필
2014년 10월 13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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