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영화 포스터(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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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4. 8.20)
조우성의 미추홀 - 영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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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리재 초입에 있는 애관극장엘 이따금 간다. 이 극장을 굳이 찾는 것은 한 세기 전, 우리나라에 근대적 예술 공간인 극장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부터 '협률사(協律舍)', '축항사(築港舍)', '애관(愛館)'이란 이름으로 인천의 극장문화사를 제자리에서 지켜왔다는 고마움 때문이다.
▶초창기 남사당패들의 땅재주 놀이와 '육혈포 강도'로 대변되는 신파극, 그리고 우리 연배들이 기억하는 임춘앵 일행 등의 국극단(國劇團) 공연, 장소팔ㆍ고춘자 씨의 만담, 서영춘·백금녀 씨의 코미디, 각종 집회 등을 모두 소화했는데, 그만큼 사회적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애관'의 본업은 어디까지나 활동사진 상영이었다. 1924년 5월 한국인의 손으로 문을 연 이 활동사진 전문관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표관(瓢館)', '가무기좌(歌舞技座)'의 무료 흥행 등에 맞서 경쟁하면서 1926년에는 '근사인산(謹寫因山) 활동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1928년 9월 6일에는 나운규의 '사랑을 찾아서'를 상영해 부민들을 사로잡았고, 1930년 2월 2일에는 인천 지역 최초로 발성 영화인 '야구시대'를 상영해 영화팬들을 열광케 했다. 하지만, 주 상영작은 일본 시대극과 미국 서부극을 위시한 유럽의 여러 영화였다.
▶이렇다 할 오락거리가 없던 시대에 영화 전성기를 누렸던 것인데, 1940년대 초 전운이 감돌자 일제는 인천에서 등화관제를 실시하고 학생들의 교복을 군대식 국방색으로 바꾸는 등 발악을 하다가 결국에는 '야구 경기'와 '서양영화 상영'을 금지하는 비문화적 조치를 취했다.
▶인천사람들이 영화를 제대로 보기 시작한 것은 광복 후였다. 그 무렵 '인천의 영화광'이었던 이광한 씨가 주로 다녔던 극장도 '애관'이라고 한다. 이번에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이 그의 일기에 등장하는 영화의 포스터를 모아 전시회를 마련해 눈길을 끈다. 1945년부터 1970년대까지 인천에서 상영된 영화는 대략 450여점으로 특히 1957년에 만든 인천 영화 '사랑'은 지역의 허약한 영상문화 실정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도 한다. 울긋불긋한 포스터와 극장표 등이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이색 전시회다.
/주필
조우성 webmaster@incheonilbo.com
2014년 08월 20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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