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해상참사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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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4. 4.18)
조우성의 미추홀 - 해상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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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개항 직후 인천항에는 국내외 각지를 오가는 근대적 의미의 기선이 등장했다. 규모야 보잘 것 없었지만, 돛단배로 고작 인근 섬 지역을 왕래하던 것에 비하면 초창기 기선들은 최신식이었던 셈이다. 불청객으로 찾아든 일본배 '진서환(鎭西丸)'이 효시랄 수 있다.
▶그 직후 영국계 '자딘매디슨 상회'가 인천-상해 간에 '남경호'를 띄웠고, 3년 뒤에는 독일계 세창양행도 인천-용산 간에 '해룡호'를 취항시켰다. 한국계 기선이 등장한 것은 1893년에 이르러서였다. 기선회사 '이운사(利運社)는 조선정부의 연안 해운업을 대행하며 출발했었다.
▶이운사는 세곡 운반선인 창룡호와 두익호 등 4척의 기선을 구입해 창룡호는 대동강, 현익호는 부산 방면으로 매주 3회씩 운항시켰다. 일본 오사카상선회사도 항로를 개설해 해운업 잠식에 나섰고, 러시아 동양기선회사도 블라디보스톡 항로를 열어 국제 해운전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인천항을 기점으로 하는 국내외 해운업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인천항에서 가장 큰 해상 사고를 당한 것은 1923년 12월24일이었다. 겨울에 느닷없는 풍우로 33척의 선박이 파손되고, 39명이 익사, 17명이 행방불명된 예기치 못한 변을 당했다.
▶광복 직후에도 끔찍한 해상 사고가 이어졌다. 1949년 평해환 작약도 해상 전복(52명 사망), 1957년 예선 인천항 침몰(32명 사망), 1963년 여객선 갑제호 유빙 충동(6명 사망), 1966년 수산고 실습선 격렬비도 해상 조난(9명 사망) 등으로 시민들은 슬픔을 가누지 못했었다.
▶그제는 인천항 개항 이래 최악의 참사가 발생했다. 하늘에 대고 원망이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또 비상사태에 임하는 국가 대응은 적절했는가 준엄하게 묻고 싶었다. 국민의 안위는 뒷전인 채 정쟁만 일삼는 정치인들의 행태도 종일 무심한 바다에 오버랩되고 있었다.
▶저 꽃 같은 학생들, 남녀노소 여행객들의 생사를 몰라 애태우는 그들의 형제부모와 온 국민은 오늘도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국가·사회의 기강이 무너져 내린 틈새로 찾아든 이 참절(慘絶)한 비극에 모두 자숙·자성해야겠다.
/주필
2014년 04월 1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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