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이기문(70회) 특별기고/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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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기호일보(14. 4.21)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특별기고/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기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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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문 변호사
교육 상담가인 웨인 다이어의 「행복한 이기주의자」라는 책을 보면 제8장 ‘정의의 덫을 피하다’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껏 존재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져 있지 않다. 새는 벌레를 잡아먹는다. 벌레에게는 공평치 않은 일이다. 거미는 파리를 잡아먹는다. 파리에게는 공평치 않은 일이다.
정의라고 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개념이다. 이 세상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늘 불공평하다. 허나 행복을 택하고 불행을 택하는 것은 정의의 부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른바 정의 부재론이다. 정의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지적대로 세상에 정의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인간의 세계에서 ‘정의’라는 것이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인간의 바람이 ‘정의’ 관념을 만들어 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는 25일이 ‘법의날’이다. 법이라는 것도 그렇다. 인간들이 인간의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한 하나의 기준으로서, 다수의 이해를 일치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정의는 존재하지 않을는지 모르나 정의 관념은 존재했다. 바로 탈리오의 법칙이다. 이는 응보적 정의 관념에 입각한 개념이다. 탈리오 법칙은 응보적 정의의 원시적 표현이다. 무제한 복수를 허용하던 단계에서 동해 보복의 정도까지 보복을 허락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와 같은 응보적 정의 개념은 허용되지 않는다. 법에 의해서만 보복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법을 다루는 법관들을 통해서만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정의를 갈구한다. 정의란 사람이 지켜야 할 올바른 도리라고 개념화된다. 이러한 의미의 올바른 도리가 이뤄지지 않을 때 우리는 분통을 터트리거나 좌절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의 정의는 직선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는 처음부터 직선과 같은 의미의 정의는 웨인 다이어의 지적처럼 존재하지 않았다. 탈리오가 직선적 정의를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기는 하다.
하지만 오늘날은 모든 인간의 삶들이 직선화돼 있지 않다. 모두가 굽어 있다. 우리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원하는 정의의 방향은 도대체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는 있으나, 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얻어낼 수는 없다. 아마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탈리오와 같은 ‘사적 복수’는 이제 또 다른 범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의 실현의 도구로서의 법관이 보편적 정의의 실현 도구로 기능하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정의라고 하는 것이 정말 비현실적인 개념이 아닐까? 실제로 이 세상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세상이 정의롭지 못함을 느끼며 불공평을 느낀다.
정치인들도 정의를 외친다. 법조인들도 정의를 외친다. 모든 이들이 정의를 외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허재호 사건의 하루 노역 5억 원 사건에서 보듯, 세상은 정의롭지 못하다. 법관들이 그러한 판결을 만들어 냈고, 대법원이 이를 용인했다.
정의를 외치던 기관이 은밀한 곳에서 ‘부정의’를 만들어 내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는 모두 인간 심성이 굽어진 데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심성이 곧바로 직선으로 서지 않는 한, 정의는 세워지지 않는다. 임마누엘 칸트의 지적대로 “비틀어진 나무로 만들 수 있는 직선은 없다.”
인간은 언제나 양면성을 띤다. 정의를 추구하는 한편 부정의를 따르는 것이 인간이다. 세상에 완전한 정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2014년 04월 21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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