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우체통(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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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4. 3.12)
조우성의 미추홀 - 우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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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인천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이듬해, 고종은 '답례로 외국을 방문하는 사신'인 보빙사(報聘使)를 미국에 파견한다. 주한 미 공사 푸트가 부임한 데 따른 답방이었다. 전권대신 민영익, 부대신 홍영식, 수행원 유길준, 통역관 우리탕(吳禮堂) 등 11명이 떠났다.
▶1883년 7월 16일 인천을 출발, 9월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시카고, 워싱톤, 뉴욕 등 주요 도시를 돌아보는 대장정이었다. 그들은 백악관을 비롯한 공공기관은 물론 철도국, 전신국, 우체국, 은행, 신문사, 방직공장, 전기, 전차, 호텔 등 신문물을 두루 살펴보았다.
▶"보빙사는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새로운 문물의 샘플을 200여개궤짝에 싣고 왔다. 그들이 가져온 것은 단순히 발달한 과학기술 제품만이 아니었다. 조선을 개화해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벅찬 포부도 안고 돌아왔다"(이기열 지음.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그 같은 꿈의 하나로 실현한 것이 우정총국(郵政總局)이었다. 고종은 전교를 내리고, 병조참판 홍영식을 총판으로 임명했다. 이어 청사 확보와 5종의 문위우표를 발행해 1884년 11월18일 마침내 서울과 인천 간 우편업무를 개시했다. 최초의 우편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초대 우정총국 인천분국장(지금의 인천우체국장)에는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이 부임했다. 그러나 개국 16일 뒤인 12월4일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으로 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홍영식은 제 꿈을 펴기도 전에 비명에 간 순탄치 못한 출발이었다.
▶그 직후에는 제국주의 일본과 종주국을 자처하던 청국에 의해 우편권을 유린당하기도 했다. 인천 주재 일본 영사가 제 마음대로 소위 재외 우편국을 열었고, 인천해관(海關·세관)에서 소위 '해관 우표'라는 이름으로 청국 우표를 사용하는 만용을 부렸다.
▶그로부터 130년. 우편사업의 상징적 풍물이던 '우체통'까지 사라진다는 소식이다. 이용하는 이들이 적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천에서는 '우체통'뿐만 아니라, '우체국'도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이에 대한 지역사적(地域史的) 보존 대책이 시급하다.
/주필
2014년 03월 12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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