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지용택(56회) 칼럼/도 즐기며 상대방 권세 잊으라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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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4. 3.12)
지용택 칼럼/
도 즐기며 상대방 권세 잊으라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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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춘추시대(春秋, BC 770~BC 403) 말에서 전국시대(戰國, BC 403~BC 221)에 이르는 시기에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BC 399), 플라톤(Platon, BC 427~BC 347),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 같은 서양 철학의 효시를 이루는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특히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는 시종일관 강의식 수업에 반대해 스승과 제자들이 서로 비판하는 교육방법을 실천했기 때문에 반교조주의적인 전통을 갖고 있었다. 플라톤의 수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는 스승 플라톤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보다 진리를 더욱 사랑한다."라는 명언도 남길 수 있었다. 존경하는 스승이라 하더라도 학문에서 시비를 가리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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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국에선 스승과 제자 사이의 학문적 전승에서 학술과 학습법은 엄격하게 지켜져야 했다. 이것은 같은 학통 내 관습이고, 다른 학파에 대해서는 자유롭고 날선 비판으로 이른바 제자백가(諸子百家, BC 550~BC 240)의 학문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예를 들어 진시황이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150여 년 동안 제(齊)나라 수도 임치(臨淄)에 있었던, 이른바 직하학궁(稷下學宮) 같은 곳은 왕의 간섭 없이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고 또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곳은 학사촌(學士村)이라고 불릴 정도로 학문이 융성했으며, 이곳에서 공부하고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학자(學者)로서 이름을 높일 수 있는 보증수표였으므로 사상과 학문의 황금기라고 할 만했다.
『사기(史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엔 "춘추시기에 시해를 당한 군주가 36명이었고, 멸망한 나라가 52개였으며, 제후가 달아나서 그 사직을 보존하지 못한 곳은 셀 수조차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는 난세였지만,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경제적으로는 크게 발전했다. 농사에 소를 부리는 우경(牛耕)이 시작됐고, 철제 농기구 사용과 관개사업을 통해 치수(治水)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서 농업이 발전했고, 상공업 또한 번성해 대도시가 형성되고 청동화폐가 사용됐다.
춘추시대 주(周) 왕실이 약화해 140여 개 제후국이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시기를 겪으며 10여 개 제후국으로 줄어들고,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진(秦)·초(楚)·연(燕)·제(齊)·조(趙)·위(魏)·한(韓)이 전국칠웅(戰國七雄)으로 정립됐다. 그들은 천하의 주인이 되고자 부국강병을 내세워 사인(士人) 출신의 책사들을 모셔오기 위해 경쟁했다. 춘추시대의 공자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항상 냉대를 받았는데, 때로는 밥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어 스스로도 자신을 상갓집개(喪家之狗)와 같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맹자가 열국(列國)을 돌아다닐 때는 "수십 대의 수레와 수백 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제후를 찾아다니며 대접을 받았다."<『맹자(孟子)』, 등문공하(?文公下)> 맹자가 가는 곳마다 귀빈과 같은 예우를 받지 않은 곳이 없으니 그 위엄이 공자 때와는 비교를 할 수 없었다.
춘추시대의 사인(士人)은 "군주가 있는 자리에서는 공경해 마치 불안한 듯했고", "조정 문을 들어설 때에는 조심스레 몸을 굽혔다"고 했으나 전국시대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로 세상의 제후를 겨누는 자세와 철학이 명쾌했다. "왕공귀족에게 진언하려면 그들을 만만하게 보아야 하며 높게 보지 말라"고 했다. 그는 도덕과 정의의 화신으로 등장해 군주들이 옛 현명한 군주를 본받고 자신의 권세와 지위를 잊어버리도록 가르쳤으며, 사인들에게는 "자신의 도를 즐기며 상대방의 권세를 잊으라(樂其道而忘人之勢)!"<『맹자』, 진심장구상(盡心章句上)>고 격려했다. 이쯤 돼야 권력, 세력, 재력, 병권을 한손에 쥔 제후와 마주해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으리라. 이 시기에 배출된 책사들은 하나같이 대부분 서민 출신이어서 포의경상(布衣卿相)이었지만, 그 긍지와 기백은 하늘을 찔렀다. 소진(蘇秦, ?~BC 317)은 가난해 형편이 초라하기 그지 없었지만, 나중에 위세가 당당해져 결국 여섯 나라의 관인을 허리에 찼고, 장의(張儀, ?~BC 309)와 인상여(藺相如) 등을 비롯해서 그 시대를 움직였던 책사들 역시 이처럼 출신이 한미했지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풍운아이며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들이었다.
이 근래 교수·법조인·저명인사 등은 물론 자칭 타칭 '사회적 멘토'라는 많은 사람이 정치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자신의 철학과 소신보다는 시의에 따라 햇볕만 따라다니는 철새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오랜 시간 고전들을 공부하고, 사색하며 '군자(君子)란 무엇인가?'를 고민해왔는데, 이 말을 현대로 가져와 보면 '시대와 사회에 대해 고민하고, 책임을 지는 지식인'이라고 재정의할 수 있을 듯하다. 시대와 사회를 고민하고, 책임을 느끼는 지식인이 아니라면 그런 지식인을 어디에 쓰겠는가. 이런 지식인들에게 맹자 같은 성인이 되라고까지 요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시민들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존재여야 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세계는 미국과 중국의 G2, 중국의 표현을 빌리면 신형대국(新型大國) 질서이다. 이는 춘추전국시대와 맞먹는 무질서와 혼돈의 시대일 것이다. 이런 시대의 지식인이라면 권력, 세력, 재력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과 비판 정신을 드러낼 수 있어야만 지식인의 책무를 다하는 것이다.
2014년 03월 12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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