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이경종(53회)/12월18일을 '인천학도의용군의 날'로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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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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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8일을 '인천학도의용군의 날'로
/이경종 인천시 중구 경동 학도의용군 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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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63년 전인 1950년 12월 18일은 인천에서 중학교(당시 6년제) 학생들로 조직된 인천학도의용대 대원 전원이 당시 중구에 있던 축현국민학교에 모여 출정식을 마치고 고향 인천을 떠나 남쪽으로 남하하기 시작한 날이다. 그 때 필자도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에 재학중으로 학도의용대 해성지대대원으로 동참했다.
당시 인천 학생들이 고향을 떠나게 된 동기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며칠 뒤 인천이 북한군에게 점령을 당했고, 그 때 느꼈던 고통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복 후 어지러웠던 고향 인천을 지키기 위해 조직된 인천학도의용대원들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천이 또 다시 북한군에게 점령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고향을 떠난 것이다.
이날 모인 학생들은 오후 4시쯤 축현학교를 출발했다. 이 날 아침부터 내린 눈으로 행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행군은 도원고개를 넘어 남동쪽으로 가서 안양까지 밤을 새워 걸어가는 고난의 길이었다. 이튿날 수원으로 가서 일부는 화차 지붕에 올라가 남하했지만, 대부분 걸어서 마산까지 후퇴했다. 마산에 도착했을 때 학도의용군들에게 들려온 소식은 또 다시 고향 인천이 북한군에게 점령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마산에서 해병대 모집에 600명이 자원 입대하고 나머지 대원들은 학도의용대 지휘부 지시에 따라 부산으로 가서 육군제2훈련소에 입소했다. 이때 3주간의 훈련을 마친 인천 학생들 가운데 500여명은 당시 동대신동에 있던 육군통신학교에 입교했는데, 이는 신봉순 대위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필자는 보병으로 강원도 수도사단에 배치돼 향로봉전투, 금화지구전투,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등 각종 전투에 참전했다. 휴전 후에는 26사단 공병에 전속된 후 2년 뒤 만기 전역해 '20세 제대군인'으로 됐다.
필자는 그때까지도 부모님 아래서 공부를 하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왜 바보처럼 군대에 갔을까'라는 후회를 하면서도 '너희들이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전쟁터에서 나라를 지켰기 때문이다'라고 위안을 삼았다. 전쟁 때문에 공부할 시기를 놓친 필자는 배우지 못한 한을 품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치과의사인 아들에게 아버지가 살아온 얘기를 해준 일이 있었다. 그 때 아들은 아버지의 6·25 참전 역사를 찾겠다며 1996년 9월15일 '인천 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를 꾸리는 한편 '인천 학생 6·25 참전관'도 만들었다. 누구도 인천 학생 6·25 참전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6·25 전쟁은 민족상잔의 비극으로 우리 민족 전체에게 엄청한 고통을 안겨줬다. 이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12월18일을 '인천학도의용군의 날'로 지정해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당시 학생들의 애국심과 희생도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3년 12월 18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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