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지용택(56회) 칼럼 /'육도(六道)'의 재해석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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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11.13)
지용택 칼럼/
'육도(六道)'의 재해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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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80장에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이란 말이 있다. 노자는 이웃 나라끼리 마주보고(隣國相望),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릴 정도(鷄犬之聲相聞)로 작은 나라가 좋은 나라라고 말한다. 2600여 년전 주(周)나라 왕실은 힘과 권위를 상실했고, 400여개의 제후국들은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으로 밤낮을 지새웠다. 권력자들은 서민층의 생활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부를 쌓고, 병기를 비축했다. 지배층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통해 천하를 통일하겠다고 주장했다면 이런 권력자들의 횡포에 맞선 노자의 사상이 '소국과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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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구가 70억을 넘어섰다. 문명이 최첨단으로 발전해 전화기를 들면 세계 어느 곳, 누구와도 통화가 되고, 24시간도 안 돼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올 수 있기에 우리는 서슴없이 '지구촌 한가족'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진정 한가족이라면 인정도 남다르고, 여유도 있고, 삶의 풍경도 좋고, 공기도, 물도 맑아야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강대국끼리의 전면전은 적과 내가 동시에 파멸하기에 서로 피하지만, 힘 없고 작은 나라에서는 국지전이 날이면 날마다 멈추는 날이 없고, 테러는 일상다반사처럼 됐다. 원자력발전, 자동차, 냉장고 등 각종 문명의 이기를 이용해 가정과 사회, 국가가 편하게 활동하고 생활할 수 있다지만 사실이 그럴까?
옛날처럼 일을 강제하진 않지만, 성과주의라는 괴물이 나타났다. 성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뒤통수에 스스로 '노동수용소'를 달고 살아가는 시대이다. 우리는 모두 성과주의 노예로 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승자가 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건강, 사고력, 시간)을 쇠진시킨다. 마치 악마와도 타협할 기세다. 이제 우리 사회는 '피로사회'를 넘어 '절벽사회'를 향해 가고 있다.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 인구를 넘어섰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지금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류 중 8억4200만명이 기아 상태에 있고, 한 해에 260만명이 굶어죽는다고 한다. 또 북한 인구의 31%에 해당하는 760만명이 굶주리고 있는데, 아시아에서 그 비율이 가장 높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와 정의가 살아 숨쉬는 지구촌 한가족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어렵다고 하지만, 세상에는 희희낙락하면서 무상(無上)의 풍족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렇기에 불교의 윤회사상에서 나온 육도(六道)를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육도란 사람이 생전에 지은 업보에 따라 태어나고 죽어서 가는 여섯 곳을 말한다. 육도 중 첫 번째는 '지옥의 고통(地獄苦)'인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한 사람이 가는 지구 끝자락에 있는 어두운 불구덩이를 말하지만 사실 이러한 곳은 없고, 또 있어서도 안 된다. 부처님이 이렇게 가혹한 공포감을 만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가 '아귀의 고통'인데 뒷부분에서 다시 이야기하겠다.
세 번째는 '축생의 고통(畜生苦)'인데, 가축으로 태어나서 겪는 고통을 말하지만 요 근래에는 강아지도 목에 거는 금목걸이가 있고, 어딘가 배설이라도 할라치면 주인이 뒤쫓다가 깨끗이 치워줘야 하니 편한 팔자라 할지 모르겠으나 자유의지가 없고, 노예근성에 절어 있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네 번째는 '아수라의 고통(阿修羅苦)'인데, 끊임없이 전쟁하고 싸워 주위 사람을 공포에 떨게 하는 생명을 말한다. 아수라들은 대량살상무기를 이용해 수십만 명을 죽이고 영웅으로 후대를 받으며 호화스러운 생활과 함께 권력을 누린다. 어떤 이들은 그들을 저주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이런 역할을 하고 싶어 생명을 걸고 싸우니 이것이 아수라가 아니고 무엇인가.
다섯 번째는 '인간의 고통(人道苦)'인데, 흔히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애별이고(愛別離苦)'를 말하지만 이것은 생각하기에 달려 있다. 삶은 백년이 고통스럽다고 하지만 그래도 결혼하고, 아이 낳고, 웃고 울고, 살아볼 만하다. 다만 건강, 장수, 권력, 그리고 돈만을 신(神)으로 모시는 우(愚)를 범하지 않는다면 그런대로 인생이란 무대에 올라 주어진 역할을 다하고 내려오면 되는 것이다. 여섯 번째는 '천도의 고통(道苦)'으로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를 통틀어 말하는데, 이는 정신세계를 말하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기에는 재미가 없다. 우리가 한 세상을 살다보면 지옥에 직면할 때도 있고, 축생이나 아수라에 걸려 뜻하지 않게 고통을 당할 수도 있고, 또는 천계에 몰입돼 정신세계에서 고요하게 공부하며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두 번째 '아귀의 고통(餓鬼苦)'은 우리가 사는 오늘의 현실 사회와 밀접하다. 아귀는 원래 힌두교에서 유래된 것인데, 배는 남산만 하지만 목은 바늘구멍만 해서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군상을 말한다. 이것은 불쌍할 뿐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판 한국의 아귀는 겉보기에 보통 사람과 똑같이 생겼지만 머릿속의 뇌는 충족함을 알지 못하기에 먹으면 먹을수록 더 배고파 하는 무리이다. 아흔아홉 섬을 가지고도 없는 사람의 나머지 한 섬을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천 섬을 채우고도 앞뒤 안 보고 내달리는 아귀들이다.
이처럼 무한욕망을 추구하는 세상이므로 힘들고, 어둡고, 법질서가 깨지고, 논리가 서지 않고, 힘과 큰 목소리가 세상을 뒤덮는다. 이럴 때 세상에 지장보살이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장보살(地藏菩薩)은 산스크리트어로 '땅의 모태'라고 돼 있다. 그는 억압을 받는 자, 죽어가는 자, 나쁜 꿈에 시달리는 자를 위할 뿐만 아니라 지옥에 몸소 내려가서 중생이 모두 성불(成佛)할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보살이다.
이 어마어마한 인도주의의 화신을 생각해낸 것은 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착안해야 한다. 우리 인간에게는 무한한 생명력과 넘치는 힘, 그리고 하늘과 땅보다 더 넓은 상상력이 있다는 사실에 긍지를 느껴야 한다. 새로운 세상을 시작할 때다. 5000만 인구 중에 지장보살 버금가는 지도자들이 없을 리 없지 않은가!
2013년 11월 13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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