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영사관(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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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11.18)
조우성의 미추홀 - 영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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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consul)'란 원래 라틴어로 '집정관'을 의미한다. 일본에서는 인천이 개항되기 전인 1869년 '태정관 포고'에 의해 영사제도가 관제로 성립됐다. 일본은 1880년 부산·원산에 처음 영사를 파견했고, 1882년 4월 19일 인천 주재 영사로 곤도마스키(近藤眞鋤)를 보냈다.
▶이는 1876년에 맺은 조일수호조규 제8관의 "일본 상민을 관리하는 관(官)을 설치한다"는 규정에 따른 것으로 그 2년 뒤인 1884년에 서울에도 영사관을 설치했다. 인천 주재 일본영사관의 관할구역은 경기도 서부, 황해도 남부(장연, 해주, 배천, 금천), 충청도 서북부였다.
▶그 무렵 일본은 여러 나라에 영사관을 설치했는데 표면적 이유는 "일본인의 해외 통상업무 확장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보고하는 것"(개항기의 외국 공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에서 방곡령 반대 등 압력을 행사하며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 역할을 수행했다.
▶그에 뒤질세라 중국도 1882년 8월 체결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 따라 영사급 외교사절인 '상무위원'을 파견했다. 이 같은 장정 체결은 속방관계에서 조약 체제로 나갔다는 의미를 갖는 동시에 과거 육로를 통한 관무역이 해로를 포함한 상민무역으로 개편됐음을 뜻한다.
▶이홍장(李鴻章)이 임명한 총판상무위원 진수당(陳樹棠)이 서울에 도착한 때는 1883년 9월 16일이었다. 장정에 따라 진수당은 인천의 상무를 겸직했어야 하나 개항장 3항 중에 특히 인천의 업무가 많아서 1883년 11월 1일 상무위원 이내영(李乃榮)을 인천 조계에 파견했다.
▶이내영의 임무는 화상들의 교섭, 형송(刑訟) 등의 사무 처리였는데, 동순태 등 화상이 모여들면서 인천의 청국 조계지 내 무역고가 조선 정부를 앞지르는 등 활기를 띠자 통역 등 직원 수를 늘렸다. 일본과 중국 이외에 인천에 영사관을 설치한 나라는 영국과 러시아였다.
▶그러나 이들 옛 영사관에 대한 미진한 연구는 큰 숙제이다. 두 번 다시 불평등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도 선행해야 할 분야다. 더불어 영사관과는 비교가 안되는 '국제기구'가 속속 들어서는 인천의 현실도 돌아보게 된다.
/주필
2013년 11월 18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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