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 체육인 이길용 선생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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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10.21)
조우성의 미추홀 - 체육인 이길용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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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여 년 전, 고구려의 왕자 비류는 인천으로 이주해 '미추홀국'을 세웠다. 그로써 비류는 역사에 기록된 '인천 이주민 제1호'로 됐다. 600년 전, 우리 고장의 이름이 오늘과 같은 '인천(仁川)'으로 바뀐 뒤에도 이주는 계속됐다. 최대의 전환점은 130년 전 개항이었다.
▶등대, 호텔, 우편, 전보, 전화, 기차, 부두, 정미소, 천일염, 성냥, 신식 초등학교 등이 처음 생기고, 축구, 야구, 자전거 같은 스포츠도 우리나라 최초로 인천에 도입되면서 과거에는 상상하지도 못한 신식 일자리 창출과 신문물의 물결이 넘실대자 팔도에서 사람이 모여들었다.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워 보도함으로써 민족적 기상을 세상에 알린 동아일보 기자 이길용(李吉用) 선생도 이주민의 아들이었다. 그는 인천영화학교 출신으로 인천을 야구의 도시로 성장시키는 데 산파역을 맡았던 선구적인 체육인이었다.
▶원로 야구인 최영업씨가 '주간인천(1960년대 발행)'에 실은 '야구 인천의 걸음마 시작은 이길용씨의 공로'라는 글에는 "이길용씨가 '배재'를 졸업하고 모교인 영화학교 선생으로 있었는데, 그때 그분의 지도로 야구 도구를 자제자급(自製自給)했었다."고 소개했다.
▶"이분이 우리 편의 매니저 역할을 했다. 당시 선수들은 스파이크, 스타킹, 운동모는 말할 것도 없고, 운동복 한 벌 제대로 차려 입은 사람이 없었지만, 대담무쌍한 지략을 지닌 이길용씨의 지도로 최초의 한일전을 '웃터골운동장(인천공설운동장)'에서 벌였다"고 전했다.
▶그러나 기자이기 전에 체육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선생의 면모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선생은 일본 유학 후 대전철도국에 근무하던 중 임정의 기밀문서를 전달해 3년간 영어의 몸으로 됐고, 일장기 사건 때도 심한 옥고를 치렀으며, 6·25전쟁 땐 납북되는 비운까지 당했다.
▶제94회 전국체육대회가 막을 올렸다. '박태환수영장' 등에서 마음껏 경기를 펼치는 선수들을 바라보며 국가의 소중함을 다시금 생각했다. 이길용 선생은 암흑기에 온몸으로 나라의 독립과 체육 발전에 헌신한 자랑스러운 인천의 체육인이셨다.
/언론인
2013년 10월 21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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