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스포츠 인천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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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10.23)
조우성의 미추홀 - 스포츠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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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월드컵 때였다. 축구의 본고장인 영국의 BBC-TV가 서울 특파원을 본사 촬영팀과 함께 인천에 보냈다. 축구 도입에 관한 멘트와 취재 안내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필자는 즐겁게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운동장인 '웃터골운동장(현 제물포고)' 자리를 안내한 일이 있다.
▶더불어 "조선에 축구를 전한 전도사들은 영국 군함 '플라잉 피쉬' 호의 수병들이었다. 1882년 8월 제물포에 상륙해 축구시합을 벌였고, 돌아갈 때 우리 측에 축구공을 선사했다. 그것이 국내 첫 축구 관전 체험이요, 망건을 쓴 채 축구를 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소개했다.
▶2002년 6월 14일 문학경기장에서 국가대표 팀이 사상 최초로월드컵 16강에 오르는 신화를 써 온 국민을 열광케 했고, 2004년 6월 22일엔 대한축구협회와 인천항에 정박한 영국 군함 '엑세터'호 장병들이 122년 전 축구가 전래되던 모습을 재현하는 기념행사를 가졌다.
▶야구도 인천에서 처음 시작됐다. 1901년 서울 YMCA를 이끌던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가 야구를 전해 주었다고 흔히 말하지만, 그 같은 주장은 인천 지역사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각 지역의 역사가 모여야 한국사가 될 것은 명확한데, 지역사가 배제된 이 빠진 주장인 것이다.
▶1899년에 이미 '인천영어야학회' 학생들 사이에서 야구 경기가 일반화해 있었는데 이를 지방의 일이라고 애써 무시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베이스볼이라는 서양 공치기를 했다"는 당시 이 학교 학생이 남긴 일기 속의 기록은 한국야구협회가 발행한 '한국야구사'도 소개하고 있다.
▶그 같은 야구의 열기가 바탕을 이뤄 1920년대 인천에는 한용단을 비롯해 기봉, 상우회 같은 한국인 팀과 '미나토(港)', 인천세관, 실업단, 은행단 등 일본인 팀이 등장해 한-일전을 벌였다. 그중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회원이 주축인 '한용단'은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그런 역사를 지닌 인천의 축구와 야구계가 그간 걸출한 선수들을 배출해 한국 스포츠 발전에 크게 기여해 온 것이 사실이다. 최근 유나이티드 FC의 역동적인 재기와 LA 다저스의 류현진 선수가 세계무대에서 우뚝 선 모습에서 자부를 느낀다.
/주필
2013년 10월 23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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