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팔미 등대(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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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 6. 3)
조우성의 미추홀 - 팔미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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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에서 조선에 이어졌던 '공도책(空島策)'은 문자 그대로 섬을 비우는 정책이었다. 적의 침입을 막아내기 어렵자 백성을 아예 내륙으로 철수시켰던 것인데, 이는 섬을 해외 진출의 거점으로 삼기보다는 포기한 수세적 해양관의 결과였던 것이다.
▶인천항에서 남쪽으로 13.5㎞ 떨어진 팔미도가 '공도책'의 대상이 됐을 리는 없다. 섬의 규모가 작은데다가 육지와 그리 멀지 않았던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언제부터 사람들이 오갔는지는 알 길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익명의 존재였다.
▶하지만 고산자 김정호의 '청구도'에는 '팔미(八未)', 대동여지도에는 '팔산(八山)' 등으로 소개되었고, 후에 사주(砂洲)에 의해 연결된 두개의 섬이 마치 여덟 팔 자처럼 양쪽으로 뻗어 내린 꼬리 같다고 해서 '팔미(八尾)'라 했다고 한다. 실제로 가보면 그 설명이 그럴 듯해 보인다.
▶그뿐 아니다. 산 정상까지 오른 키 큰 해송과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라보는 경관도 장관이다. 영흥, 자월, 무의도 등이 한눈에 잡힐 듯싶고, 예로부터 팔미도를 돌아드는 돛단배의 모습이 아름다워 인천팔경의 하나로 '팔미귀선(八尾歸船)'을 꼽았다는 해상 경승지다.
▶팔미도가 역사의 전면에 선 것은 그곳에 등대를 세우면서 부터이다. 일본과 체결한 '통상장정'에 의해 1902년 조선정부가 인천에 '해관등대국'을 설치하고, 그 이듬해 6월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자 서(北長子嶼)에 등대를 각각 완공했는데, 그것이 우리나라의 효시였다.
▶비록 강압에 의한 산물이었지만, 팔미도등대는 6·25전쟁 때 구원의 불빛으로 되살아나 역사의 증인이 되기도 했다. 일류의 희망이었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연합군 10여만 병력과 대함대의 바닷길을 이끈 것이 바로 팔미도 등대였던 것이다.
▶지난주 금요일 저녁, '등대점등 11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다. 천안함 유족, 각계인사, 시 고위간부들과 송영길 시장이 산정상에 올라 옛 등대에 직접 불을 밝혔다. 어두운 해상을 비추는 불빛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지난날의 수난사를 떠올렸다. 모두가 저 형형한 불빛으로 황해가 '평화의 바다'가 되기를 기원했으리라.
/주필
2013년 06월 03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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