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오종원 선생을 기리며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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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 6.24)
조우성의 미추홀 - 오종원 선생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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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 편집국장을 역임하신 오종원(吳鍾元) 전 논설위원 선생의 부음을 듣는다. '회자정리'라고는 하지만, 지지난달 댁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모셨던 일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만찬이었다니, 사람의 일이 어찌 그리 무상한가 싶어 적십자병원 너머의 먼 밤하늘을 바라본다.
▶더불어 40여년 전, 중구 중앙동에 있던 경기매일신문사 2층 편집국에서 처음 선생을 뵈었던 일을 상기했다. 군사정권의 언론탄압 정책으로 저질러진 소위 '3사(三社)통합'이 있기 직전이었다. 실상은 폭풍 전야였지만, '경기매일'의 편집국 분위기는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김형희 국장, 오종원 부국장이 버티고 있던 '경기매일'은 당시 인천 최고(最古)의 신문으로서 자타가 그 정통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지역 최초의 국문신문인 '대중일보'의 맥을 이어 신문사 운영을 해 온 송수안 발행인과 조수일 편집인, 윤치봉 인쇄인 등 경영진이 편집국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러나 '경기매일'은 1973년 강제로 공중분해되는 비운을 맞았고, 오종원 선생을 비롯한 몇몇 언론인들은 수원으로 이전한 통합사에 합류하지 않고 인천상공회의소가 발행한 '상공회의소보'로 자리를 옮겨 '지역 언론'의 대안 역할을 감당해 왔는데, 그 주역이 오종원 선생이었다.
▶그로부터 15년 후인 1988년 '인천일보'가 언론자율화 정책에 따라 창간되자 오종원 선생은 본보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발군의 기획력과 식견으로써 지가를 높였다. 국내 최초로 보도한 '이민 90주년을 맞는 하와이' 등 인기 연재물은 다 선생에게서 나온 작품이었다.
▶지역의 명저로 인정받는 '인천상의 100년사'를 주무하신 편집인, 겸손과 검약을 후배들에게 보여주신 언론인, 예사롭지 않은 경지에 이른 서예인으로서 품격을 지켜오신 자취가 생생하게 필름처럼 뇌리를 스쳐간다.
▶연전엔 필자에게 '백세청풍(百歲淸風)'이란 휘호를 주신 적이 있다. 아호가 '하림(夏林)'이셨다. 삶에의 뜨거운 열정을 안으로 삭히시며 살아오신 분이라 아호조차 내세우시지 않고 사신 지 향년 85세이시다. '초하(初夏)'에 영면하시니, 저 세상에서도 백세청풍, 대나무처럼 늘 푸르러 꼿꼿하게 사시리라. 명복을 빕니다.
2013년 06월 24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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