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차이나타운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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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 7.17)
조우성의 미추홀 - 차이나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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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차이나타운이라고 불리는 지역은 그 옛날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船倉里)였는데 개항 직후 청국 조계지가 되었다. 명목상 지세(地稅)는 냈지만, 조계지는 강대국이 강점한 '작은 식민지'와 다름 없었다. 조선의 관원들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던 치외지대였던 것이다.
▶당시 조정을 쥐락펴락했던 원세개가 뒤를 봐주었던 청상(淸商)들의 무역고는 조선 정부보다 훨씬 앞섰고, '동순태' 같은 거상은 차관을 대줄 정도였다. 그 같은 배경을 앞세운 인천 중국인들의 위세는 가히 목불인견에 가까웠다고 선대들은 이곳저곳에 증언을 남기고 있다.
▶어쨌거나 조계지는 '청국 거류지'라고도 불렸는데 1912년 일제가 이를 폐지하면서 지역명을 '지나정(支那町)'이라 했다. '지나정'이란 반식민지로 전락한 중국을 얕잡아 일컬은 일본식 정명(町名)이었다. 중국인은 드러내놓고 저항하지는 못했지만 이를 모욕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흔히 '청관(淸館)'이라고 했다. 문자 그대로 청국의 영사관이 자리하고 있어 부른 자연발생적 명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 때 다시 '미생정(彌生町)'으로 바뀌었다. 전보다는 좀 상향된 것이나 '중국인 지역'이란 뜻을 함축하고 있던 지명이었다.
▶광복 직후 일본의 정명을 우리식 동명으로 고칠 땐, 시지명위원회가 '미생정'을 '선린동(善隣洞)'이라 개칭했다. 1977년 북성동과 통합됐지만 지명위원회 위원들이 굳이 '선린'을 앞세운 것은 한국인과 별로 '선린'하지 못했던 과거사를 반영한 게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된다.
▶'청관'은 인천 땅의 일부였지만, 이국인의 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저간의 모습이었다. '만보산사건' 때는 평소 잠재해 있던 불만을 표출해 서로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고, 중구청의 지원에 힘입어 '청관'은 '차이나타운'으로 일대 변신을 했다.
▶한 세기 전과 사뭇 다르게 발전한 한·중 관계도 한 요인이었겠지만, 이들이 지역사회 일원으로서의 의식을 갖게 됐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사회복지모금회가 '착한가게 캠페인'에 동참한 게 그 예다. 이를 계기로 가일층 서로 '선린'을 돈독히 해야겠다.
/주필
2013년 07월 17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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