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조선왕조실록(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3. 7.22)
조우성 - 조선왕조실록
( 1048 )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우리나라는 '기록문화의 강국'이다. 한 왕조가 500여 년을 하루같이 제 역사를 시시콜콜 기록한 나라는 '조선' 밖에 없다. 유네스코가 그 결과물인 '조선왕조실록'을 서슴없이 세계문화유산의 하나로 지정했던 이유이다. 역사가 오래 됐다는 어느 나라도 그런 위업을 이루진 못했다.
▶자랑할 게 또 있다. 춘추관에 근무했던 30여 명의 사관들이 지녔던 추상같은 엄정성은 사마천도 울고 갈 정도였다. '무오사화'는 사관이 사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던진 예이다. 그렇듯 실록은 오늘의 일을 바로 적어 후세에 경계하고자 한 역사의식의 소산이었다.
▶실록은 반드시 임금이 승하한 후에 착수했다. 임금의 시비와 곡직을 낱낱이 기록할 수 있게 한 제도적 장치였다. 성군으로 추앙받던 세종도 부왕에 관한 사초를 보고자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끝내 열람하지 못했던 것이 우리의 독야청청한 '기록문화의 전통'이었다.
▶실록 제작은 춘추관을 실록청으로 바꾸고, 사관들이 사초를 제출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사초는 1초부터 재초, 3초에 이르기까지 엄격하게 가린 후 문장을 다듬어 책으로 만들었다. 채택되지 않은 사초는 정쟁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물에 불려 아예 글자를 판독하지 못하게 했다.
▶어쩌다가 잘못된 기록이 보이면 원래의 기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붉은 글씨로 수정해 애초의 기록은 이러이러했는데, 이렇게 고쳤다는 것을 후세가 알게끔 했다. 이쯤에서 봐도 선조들의 지혜에 무릎을 치게 되는데, 그 보존 방안은 더 탁월해 보인다.
▶1866권 887책에 달하는 방대한 국가 최고의 기록을 대대손손 전해주려는 것은 당시로서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겠는데, 묘책으로 '사고(史庫)'를 두었다. 강화 정족산 사고도 그 중 하나였다. 온갖 전란을 겪고 난 오늘까지 정족산본이 남겨진 것을 보면 효과적인 보존책이었음 알게 된다.
▶이에 비하면 '대한민국 시대' 의 국가 기록물 관리는 영점에 가깝다. 대통령이 '현대판 실록'인 '기록물'을 사저로 가져가고, 도마 위에 오른 '노·김 회의록'은 행방조차 몰라 허둥대고 있다. '실록'을 전해주신 선조들이 불호령을 내릴 것만 같다.
/주필
2013년 07월 22일 (월)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