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축출 데모'(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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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 7.26)
조우성의 미추홀 - '축출 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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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와 인천에는 별 인연이 없었다. 미국 잡지 '하퍼스'의 기자인 체코 출신 막스 터블스가 1886년 인천을 방문한 것이 최초의 조우였다. 그러나 그는 취재 도중 천연두를 앓다가 죽어 언더우드 목사가 집전한 장례식의 주인공이 돼 북성동 옛 외국인묘지의 식구가 되고 말았다.
▶그 뒤 1890년, 1893년, 1901년, 1902년에 각각 체코의 군함들이 인천항을 찾았고, 민간인 여행가로는 1901년 멀리 서부 보헤미아에서 인천까지 온 요세프 코르젠그키와 엔리케 스탄코 브라즈가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자세한 행적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체코가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면서 적성국으로 됐기 때문이다. 냉전 체제가 낳은 국제정치 구도 속에 힘 없이 휩쓸려갔던 처지가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던 체코가 느닷없이 폴란드와 함께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1954년이었다.
▶그 무렵 시내 중·고교생이나 각급 기관·단체 종사자들의 오전 일과는 월미도 미군부대 앞에 가서 '축출 데모'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했다. 필자도 그때 들은 "적성국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물러가라!"고 외쳤던 구호를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그랬다.
▶공산당이니까 물러가라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데모의 배경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커서도 그에 대해 들은 바가 없었다. 문제의 발단은 한반도에 핵무기를 배치하려는 미국의 의도였다. 정전협정 후 군사력 감축에 따른 공백을 핵무기로 메우려 했던 것이다.
▶반면에 정전협정에는 "외부로부터 발전된 무기의 반입을 금지한다"고 돼 있었고, 그를 지키기 위해 스위스, 스웨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4개국으로 구성된 사찰단을 남북한 5개 항구에 각각 두기로 한 데 따른 조치였다. '중립국감시사찰단'의 배치는 핵무기 반입 감시가 목적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축출 데모'는 가열돼 갔고, 결국 1955년 9월 6일 밤 9시 그들은 헬기를 타고 판문점으로 철수했다. 그 후 수십 년 간 핵무기를 머리에 이고 살았던 것도끔찍한데, 북한이 핵보유국을 자처하는 사태에까지 다다른 오늘이다. '정전협정 60주년'. 시름이 깊을 수밖에 없다.
/언론인
2013년 07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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