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인하대 로켓(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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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 2. 4)
조우성의 미추홀 - 인하대 로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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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인하대학교는 '인하공대'라 불렸다. 단과대였기 때문이다. '공대(工大)' 자체가 드물었던 시기여서 서울대 공대, 한양대 공대를 제외하면 수도권 대학 중 '공대'라 불릴 만한 곳도 없었다. 정부가 앞장서 설립한 '인하공대'에 관심이 쏟아졌던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 무렵 인천 소재 고교 이과 졸업생 중에는 '서울대 공대' 다음으로 '인하대 공대'를 지원하겠다는 학생들이 줄지어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업입국'이라는 건학이념에 따라 설치 학과도 이색적이었다. '광산(鑛山)공학과'와 '병기(兵器)공학과'는 지금도 기억나는 '과(科)'이다. ]
▶전후,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던 대한민국이유일하게 기댄 부존자원은 석탄이었다. 광산 관련업에 종사하는 걸 '자부'로 알았던 적도 있었다. 인천 지역에서도 한동안 대단위 연탄공장 주인들이 돈 잘 버는 사업가로 행세하던 때가 있었다. 시대 정황이 반영된 예라 하겠다.
▶'병기공학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설치된 학과였다. 6·25전쟁 때 김일성이 몰고 온 소련제 T-34 탱크 200대는 난공불락이었다. 독소(獨蘇) 레닌그라드 전투에서 진흙탕을 누비며 수천만의 청년을 죽게 했던 악마의 발톱에 국군도 속수무책으로 밀려났었다고 전사는 전한다.
▶나라를 지키려면, 적에 맞서 싸울 만한 수준의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게 상식이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인하공대가 1958년 '병기공학과'를 신설했다는 것은 상찬할 일이다. 병기공학과는 1960년 11월19일 지금의 연수구 동막 인근 해상에서 소형 로켓 발사에 성공했다.
▶그 후 학내에 '우주과학연구회'가 발족되어 1964년 IITA-7CR, 1968년 IITA-X21 등을 성공적으로 발사한 것은 특기할 일이다. 그 같은 환경 속에서 젊은 공학도들이 우주에의 꿈을 간직하였고, 그를 실천해 온 것은 자랑스런 발자취이다. 기계공학과 졸업생인 최상혁 박사가 미국 NASA의 연구원으로 크게 활약해 왔고, 고분자공학과를 졸업한 민경주 박사가 '나로도 우주센터 센터장'으로서 이번 '나로호' 발사에 주역을 맡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교육은 미래를 여는 가장 확실한 열쇠이다.
/주필
2013년 02월 04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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