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보도블록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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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 2.13)
조우성의 미추홀 - 보도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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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제물포에 상륙해 서울까지 하루 낮을 걸려 갔다. 네 사람이 멘 가마가 지나는데 양쪽 집 처마가 걸려 불편했고 길은 돌멩이 투성이인데다가 꼬불꼬불한 논둑, 밭둑길을 지나는데, 도로 폭은 1m 내외였다."고 전한 바 있다.
▶1894년 무렵 경인간의 도로 사정이다. 그 3년 후에 발간한 '한국과 그 이웃나라'에는 1895년 2월 5일 서울을 떠날 때 고생스러웠던 가마 대신 당시 신식 교통수단으로 알려졌던 인력거를 탔다고 하는데, 도중에 인력거가 뒤집어져 1년간 고생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렇다고 서울의 도로가 번듯했던 것은 아니다. 한 시대 전 사람인 박제가도 '북학의(北學議)'에서 "성 안의 분뇨를 전부 수거하지 못해 더러운 냄새가 길에 가득하다. 냇가다리의 석축 주변에는 인분이 덕지덕지 붙어 큰 장마가 아니면 씻겨지지 않는다"고 했다. 도로는 오물 집결소였다.
▶우리나라에 근대적인 의미의 도로가 선을 보인 곳은 인천이었다. 인발연의 김용하 박사는 "개항장의 외국인 거류지는 초기 도시 형태를 결정지은 요소로서 우리나라 근대 도시계획사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했다. 이때 하수구, 가로수, 가로등 등이 함께 도입됐다.
▶그러나 차도와 인도가 요즘처럼 구분되었던 것은 아니다. 선을 긋고, 인도에 '보도블록'을 깐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표면을 모래로 다진 뒤 넓적한 블록을 이어댄 것이 보기에 좋고, 걷기도 편해 인기였다. 하지만, 비만 내리면 보도블록이 울퉁불퉁 제각기 튀어나와 발에 걸리기 일쑤였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길을 닦을 때는 항상 흙 표면만 긁어서 새롭게 할 뿐이다. 실제로는 몇 발자국도 평평하게 만들지 못한다. 또 돌을 깐 것도 평평하지 못하고 울퉁불퉁하여 넘어지기 쉽다" 그 옛날 박제가의 말에서 아직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도로이다. 그뿐 아니다. 때도 시도 없이 '취로사업' 한다며 멀쩡한 보도블록을 갈아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불량사업으로 소문난 지 오래다. 서울시가이를 원천적으로 막을 것이라 한다. 인천서도 대책을 강구해야겠다.
/주필
2013년 02월 13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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