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기네스 기록에 오른 한복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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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 2.20)
조우성의 미추홀 - 기네스 기록에 오른 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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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서양옷을 수용한 것은 인천개항 직후였다. 1884년 갑신 의제 개혁 때의 '관복 간소화'가 출발점이었다. 1894년 갑오경장의 관복 개정, 1895년 서구식 군복 채택, 1900년 문관 복장의 양복화가 그것들인데, 여성들도 이 추세를 점진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여성 한복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외출할 때 쓰고 다녔던 쓰개치마와 장옷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쓰개치마는 치마보다 30 정도 짧고 폭도 좁게 만든 것으로 무더운 여름철에도 사용했는데 비로소 그에서부터 해방됐던 것이다.
▶그 후 양장은 신여성들에게 급속히 전파됐는데 지금 보아도 사치스럽다. 긴 드레스, 챙이 있는 모자, 손가방, 장갑에 양산까지 곁들인 것을 보면 망국적인 정세와 신여성들의 차림새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거기에 더해 일본 옷과 국민복, '몸빼'까지 나타났다. '구습 타파', '의복 개량' 등이 정책적으로 주장되기도 했지만, "조선풍을 망각하지 말라."는 민족적 자각도 있었다. 반면에 조선총독부는 1942년경 '부인 표준복'과 '몸빼' 착용을 강요해 일상화시켰다.
▶광복 후 미 군정기, 6?25전쟁을 거치면서 각종 구호물자가 넘쳐나자 '옷 생활'에도 큰 변화를 보였다. 전쟁 패션이랄 수 있는 '낙하산 천'으로 만든 블라우스가 각광 받기도 했는데 인천의 번화가였던 내동, 신포동에 '양장점'이 문을 열기 시작하던 때의 일들이다.
▶그간 나일론, 미니스커트, 청바지, 기성복, 개량 한복 등도 나름대로 시대적 정서를 상징해 왔다. 하지만 우리 고유 옷을 지키려는 노력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비위생적, 비경제적, 비활동적이라며 제 것을 업신여겼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지난 16일 충북 제천에서 ㈔한국차문화협회(이사장 이귀례)가 제40회 연수회를 가졌다. 516명의 회원들이 모두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참가한 모습이 장관이었다. 이날 '한국기네스협회'는 차문화 보급은 물론 한복을 선양한 세계 최대의 대회임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인증서'를 협회에 전달해 환호와 갈채를 받았다. 화사한 날에 기린 전통문화의 큰잔치였다.
/주필
2013년 02월 20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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