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광고 (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3. 4. 1)
조우성의미추홀 - 광고
( 1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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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광고사(廣告史)는 인천에서부터 꽃을 피웠다. 개항장이었던 제물포 해변가(현 중구 중앙동 마사회관 자리)에 자리 잡고 있던 독일계 무역상사 세창양행이 관보 한성주보(漢城週報)에 낸 '덕상 세창양행 고백(德商世昌洋行告白ㆍ1886. 2. 22.)'이 그 효시이다.
▶"이번 저희 세창양행이 조선에서 개업하여 외국에서 자명종, 시계, 유리, 램프, 서양 단추, 서양 직물을 비롯해 실, 바늘, 성냥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수입하여 물품의 구색을 갖추어 공정한 가격으로 팔고 있으니 모든 손님과 상인은 찾아와 주시기 바랍니다.(중ㆍ후략)"
▶'고백'이란 중국식 이름으로 낸 이 사상 첫 광고는 시각적 효과를 무시한 듯 긴 문장으로 이루어졌지만, 수입 상품의 종류만 일별해도 당시의 사회상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지지(紙誌)에 광고가 정기적으로 게재된 것은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부터였다. 이 때 삽화가 곁들여졌다. '슈맛트라 셕유' 광고에 '왕관', '화륜션 현익호'에 '태극기와 세창양행 기', 그리고 '금계랍'에 '토끼와 거북이' 삽화가 나오는 데 특히 이 우화 광고는 오늘날 고전으로 일컬어진다.
▶그 후 1910년대의 '매일신문', 1920년대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주도적인 매체 역할을 했으나 일본식 위주였던 것은 타 분야와 다를 바가 없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7일 인천일보의 뿌리인 '대중일보'가 창간되면서 비로소 인천에서도 광고 문화의 싹을 틔웠다.
▶대중일보 창간호 1면에는 동방, 인영, 애관 등 3개 활동사진관이 하단에 1단짜리 광고를 냈고, 2면에는 환국준비회, 건준지부, 한민당 등의 창간 축하 광고가 게재됐다. 숨 가빴던 해방 정국에서도 '광고'는 각종 정보의 공유와 지역지 운영의 중요한 동력이 되어 왔던 것이다.
▶최근 본보의 광고란이 전보다 다양해졌음을 실감한다. 이는 신문을 바로세우겠다는 임직원의 굳은 각오와 자구적 노력의 결실이라 생각한다. 각급 기관, 단체, 기업이 광고문화의 전통 유지와 진작을 통해 지역적 상생에 기여해 주시기를 부탁 올린다. 오늘로 본란 '미추홀'이 게재 1000회를 맞았다. 독자 여러분의 그간 성원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주필
2013년 04월 01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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