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곳 : 조선일보(21. 1. 2)
[아무튼, 주말] “코로나라는 주술에서 벗어날 길은 타인을 위해 흘리는 눈물”
이어령·김병종 신년 특별 대담
화가 김병종(왼쪽)은 이어령이 “지상에 눈물로 남길 마지막 흔적”을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다고 했다. 7년 전 ‘생명 그리고 동행’이라는 제목의 시화전을 함께한 두 사람은 “분노와 증오, 저주의 말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상처와 고통을 어루만져줄 사랑과 화해의 언어가 절실하다”고 했다. 장련성 기자
“끝모를 분열과 대립으로 분노와 증오, 저주의 말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누군가는 상처와 고통을 어루만져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와 예술의 몫이지만 코로나로 모든 게 봉쇄된 상황에서 이어령 선생이 병상에서 쓴 낙서, 어쩌면 지상에서의 마지막 흔적이 될 그 시가 관용과 화해의 씨앗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이 차는 20년이지만 시와 그림으로 ‘예술 동행자'가 되어온 이어령과 김병종(서울대 명예교수.가천대 석좌교수)이 새해 대담을 나눴다. ‘눈물 한방울’을 시제로 연작시를 쓴다면 김병종의 그림을 곁들이겠다는 이어령의 의지 때문이다. 김병종 대표작 중 하나인 ‘바보예수’(1985년작)는 이어령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다. 이어령은 “예수도, 석가도, 공자도 모두 울었다. 그 사랑과 참회의 눈물이 메마른 사막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코로나 주술을 이길 유일한 길은 타인을 위해 흘리는 눈물뿐이다”고 했다.
김병종(이하 김)=모두가 힘든 코로나 상황 속에서 새해 인사를 드릴 수 있어 감회가 큽니다. 투병 중에도 글을 쓰고 계신 모습에 많은 이가 위안과 힘을 얻을 것 같습니다.
이어령(이하 이)=의연하다니요. 얼마 전만 해도 88세 미수연(米壽宴)을 취소하고, 요즘 젊은이들 말마따나 한참 쫄아 있던 중인데(웃음). ‘탄타로스의 형벌’ 아시지요? 눈앞에 물이 넘실거리는데 마시려고 하면 물이 물러나버린다는 신화요. 바로 눈앞에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 있고,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려요. 그런데 손가락 하나 ‘접촉’할 수가 없습니다. ‘접촉’이 ‘접속’으로 바뀐 디지털 온라인상의 만남은 그야말로 탄타로스의 갈증과도 같은 것이지요.
김=사회적 거리 두기로 생활의 중심이 디지털 쪽으로 옮겨가면서, 그간 당연시했던 아날로그적 인간관계의 소중함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택일이 아니라 상호 보완 관계에 있다고 말씀하신 ‘디지로그’ 개념을 선생님은 10년 전에 예견하셨지요.
이=탁상 이론이야 누군들 못합니까. ‘나비 한 마리가 날갯짓하면 뉴욕 도시에 태풍이 일어난다’는 복잡계 이론을 다 알고 있었지만, 중국 우한에 사는 한 사람의 재채기로 세배도 못 드리는 새해를 맞이하리라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김=88세 미수연은 못하셨지만, 선생님은 88 서울올림픽에서 굴렁쇠와 ‘벽을 넘어서’란 구호, 그리고 80초의 영상 메시지와 ’8020 이어령학당' 같은 TV 시리즈 등으로 많은 ‘8자’를 남기셨습니다.
이=한국 사람이면 다 ‘팔자’를 타고난다고 하잖아요(웃음). 그런데 80대와 20가 서로 동행하는 세상을 살아간다는 취지의 8020 프로젝트가 요즘은 ’80대에도 치아가 20개 남는다'는 건치(健齒) 광고 카피가 돼 있더라고요. 웃을 일 아니지요. 늙으면 이빨만이 아니라 생각과 말도 다 빠져나가니. 그래서 내게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병상에 누워 한참을 생각하다 ‘눈물 한 방울’에 도달한 겁니다.
김='피와 땀과 눈물'을 말한 윈스턴 처칠이 생각나는군요.
이=저는 그런 위치에 있지도 않고 또 그 의미도 조금 다릅니다. 한국인의 시각에서 보면 ‘땀’은 가난에서 벗어나 번영을 이룬 산업화의 뜻이고, ‘피’는 억압에서 풀려난 민주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지요. 피와 땀이 하나가 되어야 하루 천 리를 달린다는 한혈마(汗血馬)처럼 힘을 낼 수 있는데, 현실은 반대로 대립과 분열의 피눈물로 바뀌고 있습니다. 거기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덮쳐 인간관계가 더욱 악화하고 있지요.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있다면 자유와 평등을 하나 되게 했던 프랑스 혁명 때의 그 프라테르니테(fraternity·박애), 관용의 ‘눈물 한 방울’이 아닌가. 나와 다른 이도 함께 품고 살아가는 세상 말입니다.
김='생명이 자본이다' ‘신바람 문화’ 등 시대의 고비마다 여러 키워드를 제시해 주셨는데 ‘눈물 한 방울’은 그 임팩트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이=”사내자식이 왜 울어?”라는 말을 듣고 자란 우리에게 눈물 타령은 여전히 창피하고 나약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수적석천(水適石穿),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속담도 있고 회초리보다 무서운 것이 엄마의 눈물이라는 말도 있지요. 한국만이 아니죠. 사랑의 눈물 한 방울이 마법에 걸린 왕자를 주술에서 풀려나게 한다는 서양 동화도 어릴 때부터 읽어왔잖아요.
김=듣고 보니 악마의 주술에 걸린 개구리 왕자가 바로 지금 코로나19라는 주술에 걸린 인류의 모습 같습니다.
이=코로나 백신은 과학기술과 기업이 만들어내겠지만 코로나로 상처 진 마음과 영혼을 정화할 심청(心淸)제, 혼청(魂淸)제라는 백신은 종교, 예술, 철학 같은 문화의 몫이지요. 지금 대중문화 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트로트 붐을 보세요. 최근 외국 기자는 트로트가 K팝처럼 세계적 성공을 거둘 개연성은 낮지만 세계에서 가장 고령화가 빠른 국가인 한국에선 오랜 기간 인기를 누릴 것으로 예상된다고 분석했어요. ‘마음과 영혼을 쏟아내는 트로트를 통해 한과 서러움을 달래고 힘을 얻는 고정 팬들이 젊고 어린 트로트 가수들에게 친자식·친손주 같은 무조건적 애정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김=코로나로부터 ‘육신의 백신’은 아직 만들지 못했지만 ‘영혼의 백신’은 만들어낼 수 있다는 희망의 증언일까요.
이=역신을 마마라고 불렀던 시대에도 그것을 달빛과 춤과 노래로 물리친 처용이 있었습니다. 런던의 페스트 대재앙을 소설로 쓴 다니엘 데포는 그것을 쓰기 전에 ‘혼과 육체를 페스트로부터 지키는 이야기’라는 팸플릿을 낸 적이 있고요. 그 제목이 암시하듯 방역은 육체만이 아니라 혼을 보전하는 것이었지요.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도 마찬가집니다. 주인공 의사 이름이 류(Rieu)인데 두문자 R을 D로 바꾸면 프랑스어로 신을 뜻하는 듀(Dieu)가 됩니다. 몸보다 그 영혼을 구하는 신의 눈물을 대신한 것이 바로 그 주인공의 역할이었던 거죠.
김=저는 오래전 ‘바보 예수’라는 그림을 그렸는데요. 발표 당시만 해도 신성 모독이라는 비난이 많았던 그림입니다.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80년대 당시 저 역시 증오와 대치의 국면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2000년 전 바람 부는 유대 광야를 홀로 걸어가셨던 예수의 눈물 한 방울이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저에게도 큰 감동을 준 그림이지요. 세속적인 시각에서 보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 떼를 두고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구하려는 것은 바보만이 할 수 있는 셈법입니다. 나자로의 죽음과 멸망해 가는 예루살렘을 보고 흘렸던 예수의 눈물, 안회(顔回)의 죽음과 골짜기에 외롭게 피어있는 난초 한 그루를 보고 탄식한 공자의 눈물, 길거리에 병들고 늙고 죽어가는 사람을 보며 흘린 석가모니의 눈물. 우리는, 아니 세계는 그러한 눈물이 말라버린 사막에서, 무인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김=한(恨)을 기층 문화로 삼아온 한국 문화는 다르지 않을까요.
이=얼마 전만 해도 그랬지요. 먹을 것은 없어도 인정의 눈물만은 ‘눈물보’에 가득 차 있었어요. 실학자인 연암도 슬플 때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칠정(七情)이 사무칠 때 생겨나는 것이 울음이고 눈물이라고 했습니다. 희(喜)·로(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칠정’이 ‘칠색’으로 나타난 것이 눈물의 다양한 무지개 색이었던 거지요. 피는 못 속이는지, 눈물을 안습(眼濕)이라 부르는 요즘 젊은 세대들도 “감동을 먹었다”고 하더군요. 눈물 기근에 굶주린 속마음을 엿볼 수 있지요. 방탄소년단이 세계를 휩쓴 노래 중에도 ‘피 땀 눈물’이 있습니다. 노랫말을 보면 ‘한오백년’의 민요나 왕년의 트로트에서 한 세기 진화한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어요.
김=미수(米壽)를 맞은 선생님과 20대의 방탄소년단 사이에서 탄생하게 될 새로운 양식의 ‘눈물 한 방울’을 생각하니 어둡던 내일에 빛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하지만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눈물은 초라하고 빈약한 것입니다. 병상에서 흘린 나의 사소한 눈물들을 노트장에 낙서해둔 글들이니까요.
김=어떤 글들인가요.
이=수술을 받고 방 안에 누워 있을 때였어요.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누운 채 사용한 휴지를 던집니다. 조금 떨어져 있는 쓰레기통으로 말이지요. 제대로 들어갈 리 있겠어요? 그런데 어쩌다 휴지통으로 멋지게 들어가는 경우가 있어요. 그까짓 쓰레기 통에 휴지가 들어간 것뿐인데 마치 삼점 슛을 날린 농구 선수처럼 “클린 슛!”을 외치며 어린애처럼 기뻐합니다. 그러다가 이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요. 내 모습이 측은하고 불쌍해서. ‘오, 하나님!’ 소리가 절로 나와요. 우리가 하나님한테 큰 것을 바랐던 적이 있었나요. 친구들과의 대화, 잘 써지는 볼펜 같은 것, 비 오는 날의 라면 한 봉지 맛 같은 사소한 것들의 행복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지금 짊어져야 할 재앙들은 너무나 크고 너무나 무겁지 않습니까.
김=신을 원망하셨습니까.
이=그 반대지요. 오히려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
김=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노여운 것인지 서러운 것인지 그때 떨어지는 차가운 눈물 방울. 낙서하듯이 그 눈물 방울의 흔적을 적지요.
김=그 글마저 쓰레기통에 버리신 건 아니겠지요.
이=김 화백과 ‘생명 동행’전(展)을 했을 때 생각이 나더군요. 엄청나게 긴 한지를 전시장 바닥에 깔고 저의 졸작 시를 먹 글씨로 거침없이 써내려가는 걸 보면서 그 붓이면 병상에서 흘렸던 눈물 한 방울들을 재생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노욕(老慾)이 생긴 거지요.
김=노욕이라니요. 저에겐 감당할 수 없이 큰 작업이지만 동양에서는 서화동원(書畵同源), 시서화 일체라고 해서 장르의 경계를 두지 않았죠.
이=병상에서 격리 생활을 하니 고통과 그 한을 품을 시간이 주어집니다. 사람들은 흔히 한을 품으려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풀어버리려고 하지요. 스트레스를 해소할 뿐 뒤에 남는 것이 없어요. 하지만 한을 품어 숙성시킨 뒤 그걸 글로 써내려가면 ‘안네의 일기’ 같은 것이 탄생합니다. 역사를 바꾸는 눈물 한 방울의 힘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죠.
김=솔제니친과 같은 문학작품이 소련을 붕괴시킨 것처럼 말입니다.
이=지금 여당에는 이성(理性)이 없고 야당에는 야성(野性)이 없다고들 하지만 정작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인성(人性)의 눈물이에요. 코끼리나 낙타도 눈물을 흘린다고는 하지만 이 지상에서 실제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지요. 지능이나 체력이 인간보다 월등한 AI 수퍼 로봇도 눈물만은 흘릴 줄 모릅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건 슬퍼서도, 괴로워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짐승 또는 기계가 아니라 영혼을 지닌 인간임을 증명하고 선언하기 위함이지요. 그리고 자신을 위한 눈물은 무력하고 부끄러운 것이지만 나와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어요. ‘눈물은 사랑의 씨앗’이라는 대중가요가 있지만 ‘눈물은 희망의 씨앗’이기도 한 것입니다.
김=새해를 ‘눈물 한 방울’로 시작하는 것이 너무 어둡지 않나 생각했는데 ‘눈물은 희망의 씨앗’이라는 덕담을 들으니 새날을 향한 발걸음이 가벼워집니다. 용기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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