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정승열(65회) 세상思/교동도의 화개산성과 관미성(퍼온글)
본문
퍼온곳 : 인천일보(13. 3.12)
세상思/
교동도의 화개산성과 관미성
/정승열시인·인천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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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페셜에선 딱히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교동도 화개산성이 관미성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관미성'이 뭐길래 이리 야단인가? 간단히 말하면 광개토대왕의 업적 중에 비중있게 언급된 것이 백제의 중요 요충지인 관미성을 함락시킨 관미성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승리를 발판으로 고구려는 백제의 위례성을 함락시키게 된다. 백제가 한성백제를 포기하고 남하할 수밖에 없는 역사의 전환을 맞이한 것도 관미성 상실의 영향이 컸다. 백제는 두세 차례에 걸쳐 관미성 탈환을 시도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결국 고구려에 완전히 굴복하고 만다. 그래서 광개토대왕능비문에도 각미성(閣彌城)이란 이름으로 이 전투에 대해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런데 그동안 관미성이 어디인지를 두고 설만 난무했지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관미성에 대한 언급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광개토대왕능 비문이다. 비문인 관계로 성의 이름만 나오고 구체적인 지명이 없다. 그다음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4에도 '관미성'이 '이름만 나오고 위치는 모르는 지명'에 들어가 있다. 이미 900년전에도 구체적인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 뒤에 신채호 선생님과 이병도 박사가 우리나라 역사를 정리하면서 강화도와 교동도를 관미성 위치로 처음 추정했다. 그 근거는 당시 한강하류와 바다가 만나는 교동과 강화는 서해 해상권을 장악하는중요한 위치였고 군사적으로도 적을 막아내는 길목으로 최적지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분의 추정은 한 육사생도가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 '관미성' 터라는 문구를 발견하면서 허물어지게 된다. 파주의 오두산이 관미성터로 대동지지에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추정이 아닌 구체적인 지명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기 힘든 지경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 뒤 파주의 오두산은 정부의 발굴조사로 옛 백제의 성터를 발견하고 이를 근거로 '관미성'터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게 됐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우선 관미성을 뒷받침할 만한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과 삼국사기에 관미성을 언급한 부분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선 관미성 형세를 "사면이 가파르고 바다물로 둘러싸여 있다"라고 돼있는데 오두산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바닷물이 아닌 강물이 흐르고 있는 곳이며 또 물에 면한 곳은 두 방향뿐이다. 또 광개토왕대왕 비문에는 '수군'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통상적으로 오두산 지역에서 해전이 벌어진 역사가 없고 또 해전을 벌일 만한 공간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당시 주 전쟁터는 예성강 주변이었는데 예성강 하구를 지나 그보다 안쪽에서 방위를 위한 성을 쌓고 서로 큰 전투가 벌어진다는 것은 이해가 안되는 대목이다. 대량의 수군을 저지하는 요충지 역할을 하려면 훨씬 밑으로 내려와 한강의 목을 죌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당하다는 논리다. 그런 중요 요충지를 버려두고 해전으로는 적합하지 장소에서 큰 해전을 벌였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다시 강화도를 구석구석 살펴보고 거기서도 소득이 없어 신채호선생님이 지목했던 교동도를 살펴보게 되었다. 거기서 연대를 알 수 없는 석성을 발견하게 되고 이것이 관미성터가 아닐까 다시 추정하게 됐다. 이것이 화개산성이다.
2000년경에 강화군과 육군박물관에서 화개산성을 조사한 바 있지만 본격적인 것은 아닌듯 하고 이제부터 우리가 한번 팔 걷어 붙이고 화개산성을 정밀하게 발굴 조사해 보는 게 어떨까 싶다.
2013년 03월 12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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