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 미추홀/'오포대'부활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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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 3.15)
조우성의 미추홀 - '오포대'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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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의 원조는 '해시계'다. 수직으로 막대기나 기둥을 꽂고 태양이 만드는 그림자의 이동에 따라 시각을 알았던 것인데, 이집트 신전 입구에 세워놓은 오벨리스크도 해시계 역할을 했다니 역사가 꽤 오래다. 초기 것은 대개 받침대에 6개의 선을 그려서 시간을 구분했다.
▶하루를 6시간으로 알았던 시대의 시계였던 것이다. 후에 석재나 목재에 둥그런 구멍을 내 만든 반구형도 나왔는데, 이때는 하루를 12시간으로 나타냈다. 조선 세종 때 '앙부일구'도 반구형이지만, 외국의 것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로 알려지고 있다. 해시계는 이밖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다.
▶그러나 밤이 되거나, 날이 흐리면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이 결정적 단점이다. 그같은 한계를 1434년 장영실이 자동시보 시계 자격루를 만들어 극복했지만 일반백성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말 청나라를 통해 기계식 시계가 들어왔을 때도 사정은 거의 같았다.
▶시계는 보편화 되지 않은 귀물이었다. 그 시대 '최고가(最高價)' 상품 중의 하나였던 까닭도 있었겠지만 백성들이 굳이 삶을 시간 단위로 쪼개 바삐 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날이 밝으면 밭에 나가 일하고, 해가 중천에 오르면 점심을 먹고, 석양에 귀가했던 것이 일상이었다.
▶백성에게 유용한 시각은 노동시간을 오전, 오후로 나누는 동시에 휴식시간을 갖는 '정오(正午)'였고 그 시각을 알리기 위한 방편이 대포 한 방을 하늘에 놓는 '오포(午砲)'였던 것이다. 그 오포를 우리나라에서 처음 쏘아 올린 곳이 '인천'이라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인천부사(仁川府史)'에 의하면, "1906년 2월 7일 2, 3발을 시험 발사한 후 9일부터 정식으로 오포제를 실시했다" 1910년 4월1일 조선의 11시를 일본의 12시에 맞춰 정오로 정하여 첫 오포를 쏘았다는 조선통감부의 공식 기록보다 4년이 앞서는 인천의 '오포제'인 것이다.
▶그 뒤 대구, 마산, 영흥, 창원, 목포, 용산 등지에 오포대가 설치되었다. 중구청이 옛 오포대 자리인 현 인천기상대 앞에 그를 부활시켜 매일 오포를 쏘는 행사를 고려해 봤으면 한다. 기왕의 '스토리'까지 곁들이면 관광 명소의 하나가 되리라 생각한다.
/주필
2013년 03월 15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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