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이제나 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거짓을 놓고도 진영 논리(陣營論理)를 펴고 있는 우리 정치권이다. 불신(不信)은 거짓에서 비롯된다. 신뢰야말로 법관(法官)의 생명이다. 법관이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사법부(司法府) 수장(首長) 대법원장의 ‘거짓말 논란’이 사법부를 넘어 정치권으로 비화, 정쟁(政爭)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나는 본란(2019년 11월 13일자)을 통해 「사법부(司法府) 너마저 !」라는 제하(題下)에, 김명수 대법원장을 향해 "세상의 모든 부류가 불의와 타협한다 해도 사법부만은 독야청청 (獨也靑靑) 해야 한다.…자기 반성과 함께 새롭게 거듭나는 사법부를 시민들은 보고 싶다"라고 전제하고 "무너진 사법부의 신뢰 회복에 힘쓰라"고 주문했었다. 


당시에 김 대법원장의 호화 관사 리모델링 공사 문제가 커다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다. 때문에 "그의 수신(修身)정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사법부의 수장 직책을 남은 임기 동안 과연 성실히 수행할 수 있을까? 하고 시민들은 우려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던 기억이 새롭다. 김 대법원장은 지금 법관 탄핵(彈劾)관련 거짓 해명 논란에 휩싸여 있다. 1년여 전 시민들의 우려대로 사법부의 수장 직책을 임기 동안 성실히 수행할 수 있을는지 지켜볼 일이다. 


정치인에 있어 거짓말은 이제 다반사(茶飯事)다. 적어도 우리 정가(政街)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질 않는다. 하지만 법조계(法曹界)에서는 다르다. 우리는 헌법 제103조에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라고 명문화 하고 있다. 법관 윤리강령에도 "법관은 공평무사하고 청렴하여야 하며, 공정성과 청렴성을 의심받을 행동을 하지 아니한다"라는 등의 윤리규정을 두고 있다. 이렇게 잘 다듬어진 금과옥조(金科玉條)를 모든 법관들이 철석(鐵石)같이 준수하고 있는 줄 믿었던 시민들이다. 


한 국가의 사법 수장이 거짓을 말하고도 전혀 문제시 되지 않는다면 또 한 번 ‘사법부 너마저!’ 라는 재차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정치권이다. 예부터도 오죽 말이 많으면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을 말을 것이/ 남의 말 내하면 남도 내 말하는 것이/ 말로서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라는 시*까지 읊었을까. 


여야(與野)가릴 것 없이 막말과 거짓말 성찬이다. 동원되는 언사 중에는 ‘공업용 미싱’, ‘후궁’ 등 별의 별 단어가 다 쏟아지고 있다. 체통과 권위는 잊은 지 오래다. 오로지 진영싸움이다. 옳고 그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편이 아니면 모두가 그르다는 논리다. 듣기가 역겹다. ‘그 입 다물라!’라는 의미가 새겨진 조선조 연산군(燕山君) 당시의 신언패(愼言牌)라도 부활시켜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이 모든 것이 국격(國格)을 제대로 갖춘 나라라면 도저히 보고 들을 수 없는 행태들이다. 국가를 위해 진언(眞言)을 해야 할 인사들마저 보신주의(保身主義)로 흐르는 풍조가 읽힌다. 이러한 풍토 아래에서 지부상소(持斧上疏) 관료(官僚)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은 나만의 지나친 바람일까. ‘입은 재앙의 문(口是禍之門)’이라 했다. 하지만 진영논리에 편승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들을 하고 있다. 자기도 속이고 남도 속인다는 ‘자기기인(自欺欺人)’이 양쪽에 딱 맞는 표현이 될 듯하다. 


오늘도 정가(政街)에는 답지 못한 인사들의 말 같지 않은 말들로 넘쳐난다. 언뜻 듣기에는 번드레하여 현하지변(懸河之辯) 같으나 정작 귀담아 들을 대목은 그다지 없다. 순간을 모면하려고 자칫 거짓말로 시작하면 변명을 거듭하게 된다. 종국에는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꼴이 되곤 한다.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곱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등의 말에 대한 속담과 격언은 많다. 실천의 문제다. 삼사일언(三思一言)은 예나 지금이나 본받을 만한 격언이라 사료된다. 


최근 코로나19 확산을 우려한 일본의 식당가에서 "조용히 먹으면 한 그릇 더"라는 ‘묵식(默食)’이 유행하고 있다 한다. 우리 정치권에 묵언수행(默言修行) 정도는 아니어도 가급적 말 적게 하는 선출직에게 한 표 더 주기 운동이라도 펼치면 조용하고 잠잠한 ‘묵치(默治)’가 되지 않을까도 생각해 본다.


 2021.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