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조우성(65회)[기고]/가천재(嘉泉齋) 탄생의 건축사적 의의(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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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24.12.2)
가천재(嘉泉齋) 탄생의 건축사적 의의
/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개항 후 인천은 건축 행정의 시험장이었다. 미추홀구 관교동에 자리 잡고 있던 전통 한옥 양식인 인천부(仁川府) 관아 건물은 제물포에 인천감리서가 들어서면서 규모나 구조 등 구체적 자료를 일체 남기지 못한 채 소리소문없이 역사의 그늘로 사라졌다. 그나마 필자가 소년 시절부터 보아온 인천부 관아의 자취는 문학초등학교 교내 한구석에 있던 볼품없는 한옥 한 채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최기선 시장 때 인천직할시는 보도듣도 못한 대규모의 '인천도호부 관아'를 만들어 냈다. 복원도, 재현도 아닌 창작이었다.
인천부 관아를 대신해 옛 제물포 포구 앞 산자락에 세운 '인천감리서'의 실제 모습도 프랑스의 여행가 샤를르 바라의 여행기에 게재된 사진에 의해 알려졌다. 사진을 보면 제법 규모가 커 보이는데 우리는 그에 대한 어떤 구체적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건축물 자체에 대한 기록이 섬소(纖疏)하거나 보존량이 절대 부족하기는 민간 한옥도 마찬가지였다. 현존하는 몇몇 인천 지역의 한옥은 거의 19세기 초에 세워진 것인 데다가 개축에 개축을 거듭해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이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눈길을 끌었던 것이 강화군 관청리에 있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다. 1900년 조마가 신부가 건립했는데, 목조 기둥과 기와지붕을 기반으로 한 절충식 한옥으로 가운데를 높인 단층에 내부의 열주 20개가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대한성공회 강화 온수리 성당도 한옥이다. 1906년 평신도들이 세웠는데 양반집을 연상시키는 솟을대문을 지나면 본당과 사제관이 나온다. 그러나 사제관의 건립 시기가 명확하지 않고, 1933년 이후 계속된 보수공사로 인해 원형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들 성공회 관련 건물들은 전도 사업이 활발하게 펼쳐지던 무렵의 시대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외부는 한옥 양식을 쫓았으나 내부는 예배를 볼 수 있도록 열주를 세우는 등 서양식 건물의 공간 처리를 차용해 순수한 전통 한옥이라고는 볼 수 없을 듯싶다.
이러한 건축사적 사정을 참작할 때, 지난달 23일 가천문화재단 교육관 부지에 세워진 가천재(嘉泉齋)는 준공 자체가 이정표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공사는 시종여일 전통 건축 장인이자 현존 유일의 국가무형유산인 최기영 대목장이 맡았다.
상량문은 심은 전정우 선생이 썼고, 현판은 소헌 정도준 선생이, 현판 각은 국가무형유산 각자장 김각한 선생이 새겼다. 국내 최고수들이 함께 기량을 발휘한 거작의 탄생이었다. 네 거장은 가천문화재단 이길여 회장의 배려 아래 지역 건축사상 최상의 정통 한옥을 세우고자 금강산서 자란 500년생 소나무를 구해 사용했고, 격조 높은 문양에 전통의 맥을 이은 우물마루와 선자서까래 기법과 독자적인 서법을 구현해 이채를 더했다.
'한 시대를 대표하고, 제작 의장이나 기술이 뛰어나며, 형태·품질·용도가 특이한 것'을 국보로 지정한다는 국가유산법에 비추어 보면, 당대를 대표하는 거장들이 공들여 세운 '가천재'가 미래 세대들의 시대에 당당히 국보의 반열에 오를 것은 명확해 보인다.
지역 박물관 중 유일하게 국보 '초조본 유가사지론'과 국내 최다의 초판본과 의서류 등을 소장하고 있는 가천문화재단이 '가천재'를 준공한 일은 지역 건축 문화사를 되돌아볼 때 큰 획을 긋는 쾌거라 생각한다. 내일을 예비한 쾌척과 용단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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