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오피니언
원현린(75회) 칼럼/유권자(有權者)(퍼온글)
본문
퍼온곳 : 기호일보(25. 5. 7)
유권자(有權者)
/원현린 주필(主筆)
원현린 주필
우리는 헌법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주권자(主權者)는 국가의 최고 절대권을 가진 자다. 공화국에서 주권자인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겠다. 유권자(有權者)는 선거할 권리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 유권자들의 정치적 무관심은 투표 포기로 이어지고 급기야는 독재(獨裁)의 출현을 가져오게 한다. 선거 시기가 도래할 때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유권자는 나라의 주인’이라며 유권자들에게 투표에 참여, 권리를 행사할 것을 적극 권장하곤 한다. 하지만 기권자(棄權者)의 상당수는 "다수의 유권자 속에 나 한 사람의 기권이 무슨 큰 영향이 있겠는가" 하고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다.
정치학에서는 이를 두고 첫째 정치는 어려워서 일반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 둘째 정치는 보통 사람의 힘으로써는 뜻대로 되게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셋째 정치는 전문적인 정치가에 전적으로 일임해 두려고 하는 것과 같은 수동적인 태도, 넷째 일상생활에 정치적 지식이 필요없어 개인 생활에만 전념하는 것이 낫다는 도피적인 태도 등으로 분석하고 있다.
정치적 무관심이 가져오는 결과는 생각보다 대단히 크고 위험하다고 본다. 우선 직업적인 정상배(政商輩)들에게 난무(亂舞)의 기회를 허용하게 됨으로써 정당정치와 의회정치의 침체 현상을 가져오게 할 위험성이 크다는 점, 다음으로는 정치적 부패와 민주주의의 반동화(反動化)를 가져오게 하기 쉽다는 점을 든다.
이 같은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에 대해 미국의 사회학자 밀스(C.W.Mills)는 "그들은 정치에 대해서는 제3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들은 급진적인 것도 자유주의적인 것도 아니며, 또한 보수주의적인 것도 반동적(反動的)인 것도 아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비동적(非動的)인 것이다. … 미합중국의 시민은 지금 그와 같은 천치바보(idiot)로써 주로 구성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라고 혹평한 적이 있다.
정치적 무관심, 이른바 DK그룹(Don’t Know)층의 증가는 민주주의의 존립 기반마저 위태롭게 한다. 그렇다. 민주주의는 참여자에 의한 정치가 돼야 한다. 적극적인 정치 참여 없이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푸른 오월이지만 희망이 보이질 않는다. 대한민국은 영토는 분단돼 있고 국민의 의식마저 지리멸렬(支離滅裂) 상태다. 지금 이 시각에도 여의도와 서초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內戰)은 멎을 기미조차 없다. 게다가 ‘민주공화국’이 아닌 ‘대행공화국’이라는 정체(政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우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라고 절규한 한 시인의 시구대로 예서 말 수는 없다.
정치인에게 권리를 위임한 유권자들이지만 일단 선거가 끝나면 정치인에게 유권자는 더 이상 안중에도 없다. 다음 선거 시기까지 유권자를 더 이상 의식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국민은 투표할 때만 자유롭다. 투표가 끝나면 국민은 또다시 노예 상태로 되돌아간다"고까지 표현했다. 유감스럽게도 이 문구는 우리 정치인들이 잊지 않으려고 되뇌는 문구 중 하나가 돼 있다.
우리는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정치에는 시행착오가 있어서는 안 된다. 국정에는 연습이 없다는 말이다. 오는 10일은 ‘유권자의 날’이다. 선거의 중요성과 의미를 되새기고 유권자의 주권의식을 높이기 위한 날이다. 우리에게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라는 최초의 민주적인 선거제도가 도입됐던 1948년 5월 10일의 국회의원 총선거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정했다. 나라의 장래 명운(命運)이 걸린 6월 3일, 제21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는 우리다. 유권자의 현명한 선택, 혜안(慧眼)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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