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후한말(後漢末)에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형주(荊州)의 유비(劉備)가 연합하여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대군을 맞아 싸우는 적벽전투(赤壁戰鬪)가 벌어지기 직전의 일이었다. 조조의 백만 대군을 목전에 둔 연합군의 총사령관 주유(周瑜)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당해낼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바야흐로 기상천외(奇想天外)한 방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의 진영에는 채중(蔡中)·채화(蔡和) 형제가 있었다. 조조가 주유의 계략에 빠져 그들의 형 채모(蔡瑁)를 참살하고 크게 후회한 나머지 두 사람을 달래 거짓으로 항복시켜 오나라로 밀파한 자들이었다. 물론 주유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지만 역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모른척 하고 있었다. 자신이 거짓 정보를 조조의 군중에 전하기 위해서였다. 또 하나의 계략인 셈이다.
주유의 심복인 황개(黃蓋)가 찾아와 화공(火攻)을 건의했다. 사실 주유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진중에는 조조의 첩자 채씨 형제가 있어 노련한 주유가 화공 같은 중요한 작전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먼저 거짓으로 항복하는 이른바 사항계(詐降計)를 생각해냈다. 문제는 그것을 행동에 옮길 사람이었다. 그러자 황개가 선뜻 자청(自請)하고 나섰다. 이 일은 살갗이 터지는 고통없이는 할 수 없는, 이른바 고육계(苦肉計)다. 황개는 그것마저 감수하겠다는 것이었다. 둘은 치밀한 계획을 마련했다. 그것은 황개로 하여금 거짓 항복을 건의토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작전회의가 한창 열리고 있었다. 이때 황개가 “누가 보아도 조조를 꺾는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나 다름없소. 이럴 바에야 차라리 항복하느니만…….” 하고 말했다. 그 때 주유의 벽력(霹靂) 같은 질책(叱責)이 떨어졌다. 물론 각본이었다. 즉시 황개는 끌려나와 형틀에 묶였다. 곧이어 곤장 소리와 함께 비명(悲鳴)소리가 들려왔다. 백여 대를 맞은 황개의 엉덩이는 허물어졌다. 그 동안 황개는 몇 번이나 까무러쳤다.
그날 밤 만신창이가 된 황개에게 심복인 감택이 와서 걱정스런 눈초리로 물었다. 황개가 사실을 말하자 감택은 혀를 찼다. 그야말로 의표를 찌르는 계책이었던 것이다. 황개는 감택을 시켜 조조에게 투항서(投降書)를 작성해 밀사를 통해 조조에게 전달했다. 물론 황개가 곤장을 맞았다는 사실은 채씨 형제에 의해 조조의 진영(陣營)에 벌써 알려져 있었다. 밀사를 만난 조조는, “흥! 이것은 고육책이다.” 하며 믿지 않았으나, 직접 현장을 목격한 간첩 채씨 형제의 보고와 다방면에 걸쳐 접수된 간첩들의 정보가 일치한다는 것을 듣고 황개의 투항선(投降船)을 받아들이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약속한 그날 밤, 황개는 기름을 잔뜩 실은 투항선단을 이끌고 조조의 대선단앞에 나타나 빠른 속도로 거대한 전투함의 선단을 들이박고 기름에 불을 붙여 조조의 대함대를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황개의 투항선 앞에는 대못을 박아놓았으므로 부딪치기만 하면 못이 박혀 꼼짝달싹 못하고 같이 불에 타게끔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노려 연합군의 수군들이 총공격하여 조조의 군사를 닥치는 대로 살륙하여 적벽전투를 대승리로 이끌었다. 위와 같은 고육책은 간첩을 이용하여 역정보를 흘린 계책이었으므로 소위 반간고육계[反間苦肉計]라고 한다.
적벽대전의 승리로 손권은 강남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유비는 파주(巴州)와 촉주(蜀州)를 얻었으며 촉왕조(蜀王朝)를 세우는데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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