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인천이 최초인 것들...
작성자 : 윤인문
작성일 : 2007.04.30 16:22
조회수 : 3,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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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원... 인천시 남구 용현동에 있는 인하대학교 후문 건너편 골목길로 오르면 아담하고 예쁜 벽돌 건물이 보인다.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보육원인 해성보육원이다. 1893년 인천시 중구 답동 답동성당의 수녀원이 완공되자 프랑스 샤르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에서는 2명의 수녀를 파견해 보육사업과 무료 진료사업을 실시했다. 답동성당은 1889년 인천에 처음으로 세워진 성당이다. 근대식 염전... 1907년 인천 주안에 최초의 근대식 염전을 만들었는데, 현 부평구 십정동 서울제강 정문 부근이었다. 처음에는 1정보(3000평) 가량의 천일염전을 시험적으로 축조했다. 이곳에는 지금 대형 공단이 들어서 있지만 예전에는 바닷가였다. 동시에 지금 인천의 중심가인 주안역 뒤쪽에는 소금 생산과 관리를 하는 사람들이 사는 주택들이 자리잡았다. 주안염전은 2단계에 걸쳐 규모가 확장됐다.1기(1908∼1911년)에 26만평,2기(1917∼1918년)에는 37만평을 각각 늘렸다. 또 1921년에는 남동염전 90만평이,1925년에는 군자염전 172만평이 만들어져 전체 면적이 325만평에 달했다. 이들 염전에서는 전국 생산량의 절반에 해당되는 연간 15만t의 소금을 생산했다. 군자와 남동에서 생산된 소금은 바닷길을 통해 인천으로 실어나르고 주안염전에서 만든 소금은 주안역전창고로 옮겨져 판매했다. 등대... 1903년 인천항에서 남쪽으로 13.5㎞ 떨어진 무인도인 팔미도에 세워졌다. 팔미도는 사주(砂洲)에 의해 연결된 두 개의 섬이 마치 팔자(八)처럼 양쪽으로 뻗어내린 꼬리와 같아 팔미도(八尾島)로 불렸다. 김정호의 ‘청구도’에는 ‘팔미(八未)’로 표기돼 있다. 인천 사람들에게는 팔미귀선(八尾歸船), 즉 낙조에 팔미도를 돌아드는 범선의 자취가 아름다워 ‘인천팔경’의 하나로 꼽혔다. 등대가 낭만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진 데에는 이 같은 요인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기상대... 최초의 기상대는 1904년 4월 인천시 중구 전동 25, 응봉산 정상에 세워진 ‘인천관측소’다. 제물포고등학교 교정 뒤편 울창한 숲속에 우뚝 솟은 백색의 원통형 건물이었다. 러일전쟁을 앞둔 일본이 해군작전에 필요한 기상관측을 위해 설치했다고 한다. ‘한국사연표’에는 1884년 7월 부산 일본전신국에서 기상관측을 시작했다고 표기돼 있지만 근대적이고 체계적인 관측을 시작한 것은 인천관측소라는 것이 정설이다. 정미소... 1892년 인천 용동에 정미소가 생겼는데, 사람들은 이를 ‘담손이방앗간’이라고 불렀다. 이는 스팀 동력 즉, 증기를 이용하는 근대식 시설을 갖춘 최초의 정미소였다. ‘담손이’라는 말은 ‘타운센드’의 우리식 발음으로, 미국인 월트 타운센드가 세운 ‘타운센드 상회’가 정미소를 만들어 붙여진 이름이다. 공립 박물관... 1946년 4월 1일 인천시립박물관 개관 초등학교... 인천항 개항 후 다양한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에도 서구식 신교육이 도입된다. 1892년 존스 목사는 인천시 중구 내동 내리교회를 보살피던 아펜젤러에 이어 2대 목사로 부임했다. 이어 감리교 여선교부도 이화학당의 마거릿 벤젤을 이 교회에 파견했다. 서울에서 교사 활동을 한 경험이 있는 이들은 1892년 4월 내리교회 내에 성경 공부를 비롯해 신교육을 펴는 매일(daily)학교를 설립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교육 기관인 ‘영화학당’의 출발이다. 물론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영화학당보다 먼저 설립됐지만 이들은 중등 교육기관으로 발전했다. 공원... 인천을 대표하는 이 공원이 바로 1888년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1897년 생긴 서울의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보다 9년이나 앞섰다. 응봉산 또는 응암산으로 불리는 자그마한 동산 위에 조성된 자유공원은 처음에는 ‘각국공원’으로 불렸다. 해외이민... 1902년 12월22일 인천 제물포항에서는 미국 하와이로 이민을 떠나는 121명이 ‘켄카이호’에 오르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84%는 인천 사람으로 대개 하층민이었다. 인천에서 하와이로 첫 이민을 떠난 사람들은 초기에 대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그들의 거처인 농막(農幕)은 군대 막사같이 생긴 판잣집들로 짐승 우리와 다를 바 없었고, 하루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렸다. 이민자라기보다는 노예 생활과 다름없었다. 쫄면·자장면...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청나라는 조선을 돕기 위해 3000여명의 군인을 파견했다. 이 때 군수물자 등을 지원하기 위해 40여명의 중국 상인도 함께 들어왔다. 이듬해 제물포가 정식으로 개항되자 많은 중국인들이 인천에 들어와 우리나라 최초의 차이나타운인 ‘청관’을 형성했는데, 여기에 중국 요릿집들도 덩달아 생겨났다. 이 가운데 하나인 ‘공화춘’은 중국 산둥지방 등에서 ‘코리아 드림’을 찾아 건너온 중국인 쿨리(古力·하급노동자)와 한국인 부두노동자 등을 위해 간편식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이것이 중국 된장인 춘장을 볶아 국수에 얹어먹는 자장면이다. 자장면을 만든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공화춘이 1895년 개업했기 때문에 이 해를 자장면 탄생연도로 삼아 기념행사를 펼친다. 성냥공장... 1900년 러시아 대장성이 발행한 ‘조선에 관한 기록’이란 보고서에는 “1886년 인천 제물포에 외국인들의 지휘 아래 성냥공장이 세워졌다. 그러나 얼마 안가 생산이 중단됐는데, 그 원인은 일본제 성냥이 범람했기 때문이다.”고 적혀 있다. 이 기록만으로는 성냥공장의 정확한 위치, 상호 등을 알 수 없지만 한국 최초의 성냥공장이 인천에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는 최초의 성냥공장은 1917년 10월 인천 동구 금곡동(당시 금곡리)에 설립된 ‘조선인촌주식회사’다. 이 공장이 인천에 들어선 것은 성냥 재료로 압록강 오지에서 생산되는 목재를 배편으로 쉽게 들여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이다... ‘인천부사(仁川府史)’에 따르면 1905년 히라야마 마쓰타로라는 일본인이 인천시 중구 신흥동 해광사 부근에 ‘인천탄산제조소’라는 사이다 공장을 세웠다. 이 회사는 미국식 제조기와 5마력짜리 발동기를 이용해 ‘별표(星印) 사이다’를 생산해냈다. 식혜와 수정과 정도가 음료로 여겨졌던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야릇한 이름과 함께 어색하게 다가섰지만 사이다를 한번 맛본 이들은 금세 톡 쏘는 맛에 매료됐다. 특이한 것은 사이다가 ‘별표’로 시작해 ‘스타(star)’를 거쳐 ‘칠성(七星)’에 이르기까지 모두 ‘별자 돌림’이라는 점이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가 사이다를 컵에 따르면 기포가 톡톡 튀는 모습이 별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아니면 말고’식의 해석으로 보인다. 축구와 야구...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호’는 일본측을 지원하기 위해 인천 제물포항에 들어와 주둔하고 있었다. 이 때 수병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잠시 상륙해 자기들끼리 축구를 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벌어진 축구 시합이다. 야구 또한 인천에서 비롯됐다. 흔히 1905년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를 이끌었던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가 회원들에게 처음으로 야구를 가르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1895년 개교해 1904년까지 있었던 ‘인천영어야학회’ 학생들 사이에는 이미 야구가 도입돼 있었다. 당시 이 학교 1학년 학생이 남긴 1899년 2월 3일자 일기에서 “베이스볼이라는 서양 공치기를 했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최초의 호텔 ‘대불’... 1888년 인천시 중구 중앙동에 세워진 ‘대불호텔’ 이 호텔은 1902년 서울시 중구 정동에 들어선 ‘손탁호텔’보다 14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대불호텔은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맞았으며 침대가 딸린 객실 수는 11개, 다다미 수는 240개에 달했다. 숙박료는 당시 화폐로 상급 객실 2원 50전, 중급 2원, 하급 1원 50전이었다. 같은 시기 일본식 여관인 ‘수월루’의 상급 객실 숙박료가 1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무려 2배 이상 비쌌음을 알 수 있다. 호텔 내에서는 외국인들의 입에 맞는 서양요리도 제공한 것으로 전해진다. 수준원점... 백두산뿐 아니라 어떤 산을 가더라도 정상에는 대개 ‘해발 xxxm’라고 표시돼 있다. 해발은 바다로부터의 높이를 말한다. 따라서 백두산 꼭대기가 바다로부터 2744m 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재는 기준이 ‘수준원점(水準原點)’이다. 인천시 남구 용현동 253 인하공업전문대학 교정 여기에 ‘대한민국 수준원점’이 설치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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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제(69회)님의 댓글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가 내리교회랍니다. 1885년 7월 7일 아펜젤러는 몇명의 신도와 예배를 드렸다네요. 이것이 국내 최초의 감리교 공식 예배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