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해병대는 6.25동란 발발 직후, 장항?군산?이리지구 전투에 처음으로 투입된 이래 ,진동리 지구 전투를 거쳐 한국군 최초의 통영상륙작전에서는 “귀신잡는 해병대”라는 영원한 애칭을 창조해냈으며, 낙동강 전선이 위기에 처했을때 미 해병대 1사단,미 육군 7사단 , 한국 육군 제17연대와 함께
1950년 8.9월 그 당시, 북괴군이 아군의 최후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에 대하여 마지막 발악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때,유엔군의 맥아더 사령관은 낙동강 전선의 위기를 타개하고, 한반도에서 적을 몰아내어, 조기에 전쟁를 종결한다는 구상을 갖고 인천 상륙작전을 계획하였다. “크로마이트로”로 부른 이 작전은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남한 깊숙이 투입된 북괴군의 퇴로와 보급로를 차단하며,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을 감행하여, 서부전선과 중동부 전선의 북괴군을 섬멸하는 계획 이었다. 연합 상륙군은 인천상륙작전을 두 단계로 구분 하였는데 제1단계는 인천항의 주요 목부분인 월미도를 선점하고, 제2단계로 인천 지역에 상륙하여 시가지를 소탕하고 해안두보를 확보하는 개념의 작전 이었다.
당시 한국 해병대는 제주도에서 학도병 3000명을 모집하여 해병대 제1연대로 증편하고,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9월 1일 제주도항을 출항, 9월6일 부산에 도착하여,미 해병대 제5연대와 연합으로 단기간 특수훈련을 실시한 뒤, 9월 12일 미 LST Q3호와 피카웨이호에 탑승하여 부산항을 출항, 인천으로 항진 하였다.
인천상륙을 위하여 9월4일부터 10일까지 선견부대 작전으로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반경 50KM이내 도로,교량,터널,철도 등 교통의 요충지를 차단하는 항공폭격을 감행하였고, 9월12일부터 서해안은 군산, 동해안은 삼척과 장사동 일대에 양동작전을 실시하였으며, 1950년 9월 15일 한반도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 상륙이 전개되었다.
유엔군 제7합동 상륙기동 부대는 항공모함을 포함한 ?미전함 “미조리”함과 순양함, 구축함 등 총261척으로 구성 하였으며, 연합상륙군은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 해병대 제1연대, 미 육군제7사단과 한국 육군 제17연대로 구성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작전에 참가한 총병력은 7만5천명으로,9월13일부터 15일까지 48시간동안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200여대의 항공기의 항공폭격과, 화력지원 함정의 함포 지원하에, 월미도에 대한 제압사격을 실시 하였다. 제1단계로 9월15일 06시30분 로켓포함이 월미도의 녹색해안을 강타하는 동안 미 해병대 제5연대 3대대가 20여척의 상륙주정으로 월미도에 상륙하여 M26전차의 사격으로 적을 제압하여 상륙 후 1시간만에 월미도를 확보하였다. 제2단계로 당일 17시 30분 미 해병대 제5연대(-)와 한국 해병대 제1연대는 상륙주정으로 적색해안인 만석동 지역으로 상륙하여 5m의 암벽을 사다리로 기어오르는 상륙을 감행하였고 미 해병대 제1연대는 상륙돌격장갑차로 청색해안인 송도해수욕장의 서부 지역으로 상륙하여 상륙돌격 장갑차에서 사다리를 타고 5m 암벽을 넘어 상륙을 감행하여 인천을 방어하는 북괴군 인천경비 여단과 제8사단 및 31사단을 격파한 뒤 해안두보를 확보하였다.
그 후속제대로 9월 18일 미 육군 7사단과 9월 24일 한국 육군 제17연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한?미 해병대가 함께 수도서울 탈환작전을 수행하고 낙동강 전선에서 미 8군은 총반격 작전을 감행하게 되었다.
당시 신현준 사령관이 지휘하는 한국 해병대는 9월 15일 17시 30분에 적색해안인 인천 만석동해안에 상륙하여 9월 16일부터 인천시가지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인천시가지 소탕작전은 경인철도를 경계로 남쪽에는 해병대 제3대대가 응봉산일대의 도심지역을 소탕하였고, 북쪽에는 해병대 제 1대대가 담당하였다. 북괴군은 인천지역을 벗어나 대부분 도주한 것으로 보였으나 상당수가 민간인 복장으로 변장하여 주택가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해병대 제 3대대는 응봉산과 하인천역을 경유하여 시청을 탈환하였다.
인천시청 탈환시는 국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인천시민들이 대한민국 해병대 용사들을 보고 적치하 3개월간 고통과 설움이 북받쳐서 소리내어 울거나 살아남은 기쁨에 흥분하여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으며, 인천시가지에는 태극기의 물결이 점점 불어가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감격의 순간 이었다. 인천경찰서로 진출한 해병대 제3대대 용사들은 북괴군에 의해 많은 시민들이 구치소 안에서 학살당한 참상을 목격하고 경악을 금치못하였으며 인천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도움으로 시가지소탕작전을 마치고 도원공원에 집결하였다.
한편 해병대 제1대대는 만석동과 화수동일대를 경유 송림동을 거쳐 현 선인학원까지 진출하여 시가지 소탕작전을 마치고 야간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한국 해병대의 신속 과감한 소탕작전으로 인천시의 질서와 안정이 회복되었으며 9월 17일에는 인천을 완전 수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천시가지는 적치하 3개월간 약탈과 방화, 학살 등 북괴군의 마지막 만행으로 피폐한 상태였다.
미 해병대 제1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인천시를 긴급복구하기 위하여 9월 18일 오후 초대 임시 시장 취임식을 거행하여 상륙군 사령관 명의로 표양문씨에게 시장 임명장을 수여하고 인천수복의 기쁨을 시민들과 함께 나누게 되었다.
한?미 해병대 및 육군은 계속해서 경인가도를 따라 부평으로 진격하여 북괴군의 주력을 격멸하여, 9월 20일 수도탈환작전을 개시하게 되었다.
이 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작전이었으며, 서해안의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와 협소한 수로 등의 여러 악조건을 극복하며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그 여세를 몰아 수도서울을 조기 탈환하여 9월 27일 한국 해병대가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90일간의 적치하에서 고통과 실의에 빠진 인천과 서울시민에게 자유를 되찾게 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에게 정치적 심리적으로 희망과 용기를 갖게 하였고, 북괴군의 병참선 차단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북괴군이 전투의지를 상실하여 총반격 작전의 계기를 마련한 역사적인 작전이였다.
인천 상륙작전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은 적 사살 1만 4천명, 포로 7천명의 대전과를 올린 반면, 아군은 미 해병대 제 1사단 2,450명, 한국 해병대 4백여명, 미 육군 제7사단 32연대 350 여명이 전사상자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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