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해 길게 솟은 붉은 기둥. '홍살문'은 '인천향교'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잡귀는 들어갈 수 없고 일반인들도 마음가짐을 깨끗하게 해야 통과할 수 있는 문이다. 홍살문 앞 '하마비' 역시 이 곳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라는 뜻으로 세워진 비석이다.
홍살문이 액자라면 인천향교는 그림이다. 커다란 네모 테두리 안 쪽으로 '인천향교'의 작고 아담한 외삼문이 그려져 있다.
홍살문 오른 쪽에 여러 개의 비석이 늘어서 있다. 대대로 인천의 도호부사를 맡았던 관리들의 업적을 기리는 선정비이다. 비석에는 관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늘어선 비석들 가운데 하나가 비어 있는 모습이다. 그쪽으로 다가간다. 가까이서 보니 비석 가운데 하나가 뽑혀져 있고, 움푹 패인 채 받침돌만 있다.
"그 자리는 을사오적 가운데 한 명인 박제순의 비 였어요. 이 삼년 전에 시민들이 뽑아서 없애버렸지요."
김정희 인천시 문화관광해설사는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인 박제순은 동학농민 때 토벌군으로 나가기도 했다"며 비석이 뽑혀 사라진 이유를 설명한다. 박제순의 비가 뽑힌 자리는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들어차 있다. 역사란 얼마나 준엄한 것인가.
홍살문을 지나 향교로 올라간다. 외삼문의 오른쪽 문으로 들어선다. '명륜당'은 16세에서 40세까지 학동들이 향학열을 불태운 곳이다. 양반은 물론 평민의 자제들까지 이 곳에서 글을 읽으며 신분상승을 꿈꾸었다. 명륜당 양 옆에 자리한 '동재', '서재'는 각각 양반 자제와 평민 자제가 기숙하던 방이다. 조선시대 중기 사립학교인 '서원'이 생기기 전까지 향교는 교육, 제사, 주민교화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서원이 생기면서 기능은 제사의식으로 치우치게 됐다. 옛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은 명륜당 뒤 쪽에 있다. 지금도 매년 음력 2월과 8월이면 이 곳에서 '석전대제'가 치러진다. 온고이지신. 학생들은 공자, 최치원, 정몽주와 같은 성현들의 학식을 동경하고 인품을 흠모하며 그들의 궤적을 좇아갔다.
대성전을 등지고 명륜당을 지나 인천향교 외삼문을 나온다. 지난 여름에도 많은 비가 내렸는데, 또다시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우산을 펴들고 홍살문까지 내려온다. 액자 같은 홍살문을 통해 그림 같은 향교를 올려다 본다.
300년 전에도 인천향교는 저 모습 그대로 저 자리에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역사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숙연함이란…. <관련기사 10면> /글·사진=김진국기자(블로그)free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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