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특집 - 인천에서 타오른 독립운동> “만세! 만세! 대한 독립 만세!!”
1919년 3월 6일 정오-. 인천 배다리 장터에는 만세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나라의 독립을 열망하며 절규하는 태극기의 물결이 노도처럼 넘쳐흘렀다. 천지개벽과 같은 인천의 첫 ‘만세 소리’에 놀란 부민(府民)들은 너나없이 하던 일을 팽개치고 뛰어나와 배다리 장터는 순식간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인천은 우리나라 근대화의 창구 역할을 했던 개항장이었다. 일제는 개항 직후부터 그 같은 지정학적 조건에 눈독을 들여 조계지(租界地)를 설치한다, 영사관을 연다, 은행을 들여온다, 축항(築港·독)을 만든다…며 인천을 철저하게 식민 통치의 교두보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설들을 보호, 유지하기 위해 경찰 병력에 군인들 까지 주둔시켜 치안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인천은 전국 어느 곳보다도 경계 태세가 삼엄했던 것이다. 각처에서 왕성하게 발흥했던 의병이 유독 인천에서 자리 잡지 못했던 원인의 하나도 이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같은 위축된 상황 속에서도 인천사람들이 끊임없이 외세에 저항하면서 독립 운동을 펼쳐왔다는 것은 기억해야 할 소중한 역사적 사실이다. 만세의 첫 깃발을 떨쳐 올린 이들은 인천공립보통학교(이하 인보)와 인천공립상업학교(이하 인상) 학생들이었다. 인보 3, 4학년생들은 3월 6일 정오에 학교를 출발, 배다리 철로 너머 인상 학생들과 합류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했고, 이어 동맹 휴교에 돌입했다. 이들은 다음 날 다시 모여 만세를 부르다가 대거 인천경찰서에 연행됐다. 후에 주동자였던 인보 4년생 김명진은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1년 6개월을 복역했고, 박철준, 이만용은 태(笞) 90대, 손창신은 연소자라 풀려났다.
8일, 인천부 전역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됐다. 특히 노동자의 분발을 촉구하는 격문도 뿌려졌다. 그 이튿날 오후 5시 30분경, 기독교 신자, 청년, 학생 등 3백여 명이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모여 만세를 부르다가 왜경에 의해 강제 해산 당했고, 8시 30분경에는 부내 동쪽 경인가도에서 부민 5백여 명이 만세를 부르다가 경찰과 충돌해 주동자 여러명이 체포됐으나 만세 운동의 열기는 점점 고조되어 갔다.
12일, 강화보통학교 3, 4학년생들이 칠판에 태극기를 그려놓고 만세를 부른 후 거리로 나서려하자 교직원들이 이를 저지했고, 이튿날 다시 1백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불러 경찰에 연행됐다.
17일 오전 9시 30분, 인상 학생 2백80여 명이 다시 학교 강당에 모여 만세를 부르고 거리로 나섰다. 주동자 17명이 경찰에 체포됐고, 일본인 교장은 직권으로 휴교 조치를 단행했다. 주동자들은 후에 3개월 형을 받았다.
18일 오후 2시, 강화읍내 장터에서 유희철, 황윤실, 장동원, 장명순, 조상문, 유봉진, 고익진 등이 군중에 앞장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의 숫자는 6천여 명에 달했다.
19일 길상면 온수리에서 천도교인 수백 명의 시위를 시작으로 만세 소리는 불은면, 교동면, 삼산면, 서도면, 화도면 등으로 퍼져나갔다.
23일에는 용유면 거주 조명원, 조종서, 최봉학, 문무현 등이 혈성단을 조직하고, 만세 격문 80여 통을 남북리, 을왕리, 덕교리 등에 배포했다.
24일 오후, 부평시장과 계양면 장기리 황어장터에서도 만세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부평에서 군중들은 면사무소를 파괴하며 경찰과 격투를 벌여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장기리 시장의 6백여 군중들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면사무소에 구금중인 심혁성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은선은 이 와중에 심혁성을 구출했으나 왜경이 내리친 칼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순절하고 말았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장기리 일대의 만세 시위는 더욱더 격렬해졌다. 시위는 자정까지 계속됐고 장기리 만세 주동자 28명 대부분은 옥고를 치렀다.
3월 하순에 들어서도 만세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27일 일본인 부윤(현 시장 격)은 한국인에게 상점을 열 것을 협박했으나 한국인 상인들은 문을 열지 않았다. 당시 신문들은 인천의 철시 상황을 보도하면서 ‘해변의 파도 소리만 시가지를 울렸다.’고 전할 정도로 시가지는 정적에 휩싸였고, 민심은 흉흉했다. 강화의 9개 지역에서도 이 날 2천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28일에도 남동과 용유도에서 만세를 부르던 군중들이 왜경에 체포됐고, 특히 29일 밤의 월곶리 시위와 4월 1일 밤 강화 읍내에서의 시위는 송해면을 거쳐 양사면, 하점면에 이르기까지 모두 13곳의 봉화가 연결된 한밤의 횃불 만세여서 장관을 이루기도 했다. 이후의 강화 지역 만세 운동은 대부분 각 동리 단위로 초저녁 산 위나 언덕에서 행한 횃불 만세였다. 인천부 내에서는 30일까지 철시 항쟁이 계속됐다. 이 날 수백 명의 천도교 교인들이 북성 고지로 만세 시위를 벌이다 해산 당했다. 31일 서창리(현 남동구 서창동) 거주 송성용 등이 만세를 모의하다 체포됐고, 4월 1일에는 1천 수백여 명이 월미도에 모여 만세의 함성을 올렸다.
인천의 3·6 만세 운동의 대미는 4월 2일 만국공원에서 펼쳐졌다. 이 날 아침 이민태, 홍진의, 이규갑, 한남수, 홍면희, 김규, 박용희, 이종욱, 권혁채 등은 만국공원에서 국민대회를 열어 조선 가정부를 선포하고, 파리강화회의와 세계 각국이 조선의 독립을 승인할 것을 요구하며 그 취지를 담은 선포문을 일반에게 알렸다. 이 만국공원 대회는 인천의 만세 운동 가운데 가장 조직적이었고, 만세 운동을 국제적 차원에서 행했다는 면이 두드러진다.
인천의 항일 운동은 이렇듯 학생, 노동자, 농부, 상인, 종교인, 지식인 등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광범위하게 지속되었다. 개항 후 인천사람들의 내면에 축적되어 왔던 항일의 뜨거운 에너지가 마침내는 3·6 인천 만세 운동으로 훨훨 불타올랐던 것이다.
글·사진제공 : 조우성(시인 / 인천시 시사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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