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의 名所] 인천을 짠물이라 부르는 이유
본문
|
|
| |
인천을 짠물이라고 부르는 이유? | |||
|
인천 염전 : 1907년 주안에 근대식 염전 첫 등장 : 백석-군자-소래 등 번창 20∼30년전부터 공단으로 그 시절 그 곳 - 인천은 「짠물」이라는 별명으로 많이 불린다. ◀ 영종도 염전의 소금채취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 짠 바닷물을 맛볼 수 있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닌데도 유독 인천만 짠물로 불리는 것은 원래 바다 때문이 아니라 염전 때문이다. 지금은 모두 공단이나 아파트단지로 바뀐 가좌, 백석, 십정동 일대와 남동-군자 지역이 불과 20∼30여년 전까지는 모두 염전이었다. 특히 지금의 수출공단 5-6단지 자리에 있던 주안염전은 1907년 일제 통감부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염전이었다. 바둑판 모양의 염전과 바닷물을 퍼올리는 물레방아, 밀짚모자를 쓰고 햇볕에 마른 소금을 가래로 긁어모으는 인부, 소금창고로 소금을 운반하는 작은 철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런 풍경은 바로 이 주안 염전에서 처음 시작된 천일제염 (천일제염) 방식때문이다. 물론 인천에는 그 전에도 재래식 소금생산이 활발해 옛 문헌에 「인천에서 걷히는 어세(어세)보다 염세(염세)가 더 많았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소금이 귀하던 때라 일제는 주안 염전을 계속 확장하는 한편 남동과 소래, 군자에도 염전을 만들어 1930년대 이후 인천의 소금생산량은 전국 최고 수준이 됐다. 여기에 천일염을 가정용 소금으로 만드는 재제조염 공장도 계속 늘어나 인천은 온통 「짠 동네」가 됐다. 그러나 그 후 인천의 도시확장과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으로 주안 염전은 68년부터 폐전(폐전)되기 시작했고 그 자리에 수출공단 5-6단지가 조성됐다. 80년대 중반부터는 백석, 남동, 군자 염전에도 줄줄이 공단이 들어섰다. 지금은 영종도의 운남-운서동 일대 40여만평, 강화도 삼산면 27만평 정도가 남아 가동중일 뿐이다. 남동구 논현동 등에는 문을 닫은 폐염전이 그대로 있다. 염전은 거의 없어졌지만 한때를 풍미했던 소금밭의 기억은 「짠물」이라는 이름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출처 : 조선일보 1997.03.23 |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