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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의 名所] 인천앞바다 탐사-교동도(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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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앞바다 탐사-교동도
2004년 11월12일 오전 10시30분 강화도 창후리 선착장. 올해 마지막이자 지나누2년을 마무리하는 탐사지는 강화군 ‘교동도’다. 교동도 주민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섬 특성상 어민들도 있을 법한데 농민들만 있을 뿐이었다. 왜 일까?
또 교동도는 유배지로 유명한 곳이다. 교동도를 탐사하다보면 연산군 적거지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돌보지 않는 이름 뿐인 지방문화재이다. 이렇게 방치된 지방문화재가 수 없이 많은 곳이 교동도다.
‘교동도의 매립 역사를 아시나요’
교동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화개산(259.5m)를 올라가면 한 눈에 섬 전체가 들어온다.
교동도 전체 해안선이 인위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농경지를 위해 매립한 것이다. 농경지 중간에 작은 봉우리가 있다는 것은 언제부턴가 갯벌 매립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고려시대때부터 매립을 시작했다고 증언한다. 교동도는 총 면적 47.16㎢으로 강화군 다음으로 큰 섬이다. 이 면적 중 65.5%가 되는 땅이 농경지다.
이 땅에서 생산 되는 교동쌀은 한해 16만t 정도라 하니 실로 어마 어마한 양이다. 이 양이면 교동 주민 3천500여명이 5년은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사실 교동 평야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우리 선조들이 교동도과 북한 연백을 경쟁적으로 매립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는 탐사내내 발견할 수 있었다. 해변 중간 중간에 콘 크리트를 이용, 사람 갈비 모양의 제방을 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교동도과 맞닿은 북한의 연백 매립과 무관하지 않다.
북한 본토인 연백에서 매립을 하면 그 만큼 물을 흐름이 바뀌기 때문이다. 바뀐 조류는 그대로 제방을 허물어 버릴 수 있는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다.해안에 즐비하게 늘어선 갈빗살 모양의 제방은 물의 흐름을 연백쪽으로 바뀌고 흐름의 강약을 조절하던 제방인 셈이다.
화개산에서 내려본 교동도의 농경지는 잘 짜인 바둑판과 같다. 또 농지를 가로지르는 농수로가 잘 발달돼 있다.
그러나 농수로 호안을 콘크리트로 만들어 썩 좋아 보이지는 않다. 최근 콘크리트를 이용한 호안이 없어지는 시점에서 농업기반공사와 주민들이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수로 자체가 물의 흐름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연 생태형 수로로 물의 정화 능력을 키워줄 필요성이 있다.
그런데도 교동도 농지정리사업을 할 때마다 농경 수로 호안을 콘크리트로 만들고 있어 탐사대원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농사를 짓기 위해 매립을 하고 저수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저수지를 만든 것은 최근 들어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교동도에는 이들 농수로와 연결된 크고 작은 저수지들이 많다. 대표적인 저수지가 지난 1997년도에 준공된 ‘고구저수지’다.
고구저수지는 면적만 770ha, 유효 저수량이 621만4천t이나 되는 어마한 양이다. 또 최근에는 농업기반공사에서 새로운 저수지를 만들고 있다.
난정저수지가 바로 그 곳이다. 난정저수지는 면적은 1만70ha로 내년에 준공을 앞두고 있다.
이렇게 매립의 섬 교동도, 분단의 아픔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교동도 주민들은 이렇게 바다 대신 농업을 선택했다.
‘연산군 적거지가 어느메요’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로 유명한 곳이다. 교동도는 ‘식사했으꺄’, ‘잘 주무셨으꺄’ 등 ‘뭐뭐 했으꺄’로 끝나는 재미있는 사투리가 숨어있는 곳이다. 강화본도와 교동도에서 많이 사용 되는 강화도 사투리인데 그 어언은 정확하지 않다.
그저 왕족과 양반의 신분을 박탈당한 유배객들에게 일반 백성들이 말을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은 묘한 억양이 사투리로 남아있다는 추측 정도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폭군으로 역사속에 남아있는 연산군이 죽어간 곳이 바로 교동도이다.
연산군이 살던 집터와 우물을 칭해 ‘연산군 적거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폭군에 대한 후세의 대접은 너무나 가혹한 듯 싶다.
연산군 적거지는 향토유적 제28호로 지난 1986년 지정되었지만 그대로 방치돼 그 흔적조차 알 수 없는 곳으로 전락했다. 밭으로 변해버린 집터에 자그만한 비석이 연산군이 다녀간 곳임을 전해줄 뿐이다.
교동도는 이렇듯 시정, 향토 문화재들이 주민, 학계, 행정당국의 무관심속에서 방치되고 있다.
수려한 홍예를 자랑하는 시지정기념물 제23호인 교동읍성도 마을주민들의 쓰레기터로 전락했다. 홍예 형식으로 세워진 남문은 개인의 대문으로 변해버려 역사적 가치를 잃어버렸다.
북한 연백 평야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화개산으로 가는 길목 한켠에 고려시대에 세워진 ‘한증막’이 외로이 서있다.
둘레 15m, 직경 4.5m, 높이 3m 규모로 원형 그대로를 간직한 귀중한 역사자료지만 후세의 보살핌은 전무하다.
한증막 작은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산 짐승의 배설물과 발자국으로 심하게 오염된 상태였다.
또 탄력과 강도가 좋아 농기계와 야구방망이로 사용되고 있는 400여년된 물푸레나무를 교동도 고구1리에 가면 만나 볼 수 있다.
물푸레나무는 지난 2001년 8월에 보호수로 지정됐다. 그러나 물푸레나무도 사정은 여느 문화재와 마찬가지로 아무 보호 장치가 없는 형편이다.
마을 주민들은 3년마다 3월초에 오랜된 물푸레나무에서 부군 당제를 모시며 이 나무를 신성시하고 있다. 그러나 마을 주민도, 행정 당국도 교동도의 문화재를 보살피는 이는 없다.
/노형래기자trueye@itimes.com
인천일보 종이신문정보 : 20041119일자 1판 9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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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주님의 댓글
저의 고향에 방문하여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