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대
신석기시대의 중간기인 금속병용기에 사람이 산것으로 추정됨 (인천 각지방의 고인돌과 문학산, 계양산에서 각종 석기들을 발견)
삼국시대 백제를 세운 비류가 문학산에 도읍을 정하고 미추홀이라 부른 것 이 처음. (옹진: 고구려의 용천, 부진이 강화:참성단, 삼랑성, 고구려혈구군 설치)
미추홀이 치정구역으로 등장한 것이 고구려 장수왕(413-491)때 고구려(475)가 백제를 침공하여 한강 유역 미추홀지역에 매소홀현을 두었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 매소홀현을 소성현으로 개칭 율진군(현과천)에 소함. (부평: 장제군, 옹진:폭지군, 강화: 해구군으로 개칭, 원성왕 6년 혈구진 설치)
삼국시대
고구려의 왕자 비류는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문학산 부군에 도읍을 정하고 미추홀을 세웠다. 삼국시대에는 각국의 격전지로서 매소홀,소성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인천은 우리나라역사의 중심지에 서게 된다. 고려때는 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배출한 명문지역으로 7대어향(七代御鄕)이란 칭송을 듣는다. 이런 이유로 경원, 인주 등으로 승격되며 관할역도 확장된다. 조선 태종 13년(1413)의 지방제도 개편 때 비로소 인천 이란 이름의 역사에 등장한다.
여기에서 미추홀의 "미"나 매소홀의 "매"는 물(水)의 뜻이며 "홀"을 성(城)이나 골로 해석되며 "추" 나 "소"는 모두 사잇소리 "ㅅ"으로 풀이 하고 있다. 고구려 시대에 매소홀이라 불리던 인천의 후기 신라의 경덕왕 16년 (757)에 이르러 소성현(邵城懸) 으로 바뀌었다. 경덕왕이 신라의 제도나 관직을 중국식으로 고치는 한편, 토박이 말로 되어 있는 땅이름을 모두 그 뜻에 해당하는 한자어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고려 숙종(1095~1105)에 이르러 소성현은 경원군(慶源郡)으로 개칭, 승격되었는데 이는 인천이 숙종의 어머니 인예(仁譽) 순덕태후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인종(1122~1146)때에는 인종의 어머니 순덕왕후 (仁川李氏)의 고향이 됨으로 "인주"(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말 공양왕 2년(1390)에 이르러 인천은 경원부로 개칭, 승격되었는데, 이는 인천이 7대 어향(御鄕)이었기 때문이다. 7대어향이란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동안 인천이 왕의 외향이거나 왕비의 고향에 해당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조선초기 태조원년(1392)에 인주로 환원되고 태종 13년(1413)에 이르러 모든 군이나 현에 '州'가 들어 있는 고을을 모두 '山'자나 '川'자로 바꾸는 바람에 인주가 물에 가깝다 하여 '인천'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인천의 명칭은 한자풀이식의 '어진내(仁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인주이씨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 려
고려 현종 9년(1018) 소성현이 (수주:현 부평)에 소속됨. 숙종조에 이르러<경원군>으로 승격
인조때 다시 인주로 승격 (부평:수주로 개칭(940), 의종 4년(1150)안남도호부 설치, 고종 2년(1215) 계양도호부로 개칭, 충렬 왕 34년(1308) 길주목으로 승격. 옹진:태조 23년(940) 옹천을 옹진으로 개칭, 백령진 설치, 강화: 태조23년 강화로 개칭, 현을 둠(995), 고종 19년(1232)강화천도군으로 승격, 우왕 3년(1377)강화부로 승격
공양왕 2년(1390)에 7대 어향이라 하여 경원부로 승격.(옹진:백령진 혁파, 강화: 유수부로 승격)
조 선
조선왕조 태조1년(1392)에 인주로 변경(옹진:태조 6년 옹현진에 진 설치)
태조 13년(1413)에 군이나 현에 주자가 들어있는 곳은 산이나 천으로 고치게 되어 인천군으로 재편하므로서 인천이라는 말이 등장. (부평:부평도호부설치. 옹진:병마사 현령 겸임, 세종 5년(1423) 첨절제사로 변경. 강화 :가오하호부로 개칭)
세조 6년(1460) 인천도호부로 승격 (강화:인조5년(1627) 강화유수부로 승격)
숙종14년(1688) 현으로 변경
숙종 24년(1698) 도호부로 복구 (옹진: 숙종45년(1719).황해수영 설치, 옹진현 - 도호부로 승격)
근 대
고종 12년(1875)운양호 사건
(강화 : 고종 3년(1866)병인양요 강화성 함락.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고종 11년(1812) 강화포대 설치, 고종 13년(1876)강화도조약 체결)
고종 19년(1882) 화도진에서 한미수호조약 체결
고종 20년(1883) 1월에 개항하므로서 통상사무를 권장하기 위한 감리서 설치
1885년 감리서 폐지되면서 인천부로 개편 (부평:인천부에 속함, 옹진: 해주부 옹진군 강령군으로 개편 호아해도로 이속)
1896년 지방제도를 개편함에 따라 경기도 인천부 (부평: 경기도 부평군으로 개편, 강화: 건양1년 강화부로 변경)
1899년 국내 최초의경인철도 개통
1906년 인천이사청 설치로 인천부윤이 감리사로 직무수행 (부평:부천군에 편입(1914), 옹진:강령군이 옹진군에 편입(1909), 백령도 장연군에 편입(1914). 강화:강화군으로 변경(1906), 교동군 편입(1914)
1936년 2차로 문학, 남동,부내, 서곶등 4개면이 편입되어 부평군 대부분이 인천으로 편입
1949년 인천시로 개편(옹진:벽석군 일부외 벽령도 편입(1945) 1949년 경기도로 이속(1949)편입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실시
1963년 부천군 작약도 편입 (옹진:백령면 대청 출장소 설치(1962), 부천군 도서 6개면 편입(1973), 대청면 신설(1974), 강화:강화읍으로 승격) 1981년인천직할시로 승격
(옹진:자월면 신설(1983), 강화:양오리 송해면 편입(1983))
1989년 김포군 계양면과 옹진군 영종면, 용유면 편입
1995년 강화군, 용진군, 김포군 검단면 편입으로광역시로 개칭
면적이 954.10제곱킬로미터로 3.56배 늘어서 현재 서울보다 면적이 1.5배된다.
◆◆ 미추홀왕국(彌鄒忽王國)의 개국(開國)정신◆◆
선구적 개척정신의 뿌리는 비류(沸流)의 개국정신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백제의 건국설화중 비류설화(沸流說話)를 보면 비류는 새로운 신천지를 개척하기위해 수천리 생소한 땅을 찾아오다 이곳 인천 문학산에 도읍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야심만만한 개국의 꿈을 키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설득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선구자적인 예지에서 우러난 확신이며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온갖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의지와 용기 그리고 실천적인 행동은 바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내고자 하는 개척정신이었다. 이 정신은 오늘날 인천이 세계속의 국제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적인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인천 최초의 항구 능허대(凌虛臺) 개척
옥련동 해안 조갯골에 위치했던 능허대는 서기 372년 우리 고장 최초의 국제적인 항구가 개척된 곳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대립하여 서로 밀고 밀치는 적대관계로 발전하게 되자 백제는 대륙과의 육로 교통이 단절되는 고립속에서 고심하던중, 중국 대륙과 가장 교통이 편리하고 가까운 항로를 개척하게 된 것이다. 이는 당시 이 고장 선조들이 어려웠던 시련과 도전을 슬기롭게 극복해낸 창조적인 정신의 발현이 었으며 새로운 해상교통을 선구적으로 개척한 슬기였다.
◆◆ 운하(運河)개척의 선구지 김포굴포(金捕堀逋)◆◆
김포굴포계획은 서해바다 인천과 한강을 연결하는 선구적인 대운하(大運河) 건설 계획 이었다. 이 계획은 고려시대에 최이가 처음 창안했으나 여러가지 기술부족으로 착수치 못했고 조선 중종시대 다시 이 계획을 다시 추진했으나 완성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웅대한 계획을 추진하던 흔적은 오늘날까지 뚜렷하게 남아있다. 이 계획은 8. 15이후 1970년대까지 경인운하계획(京仁運河計劃)으로 발전되어 왔으며 이제 이의 실현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처럼 이 고장 인천은 운하개척의 선구지로서 무엇인가 새롭게 발전하려는 선구정신이 이어져 내려왔던 곳이기도 하다.
◆◆ 녹청자 도요지(綠靑磁 陶窯址) ◆◆
녹청자 도요지는 인천이 자랑할 수 있는 문화재(文化財)중 가장 값진 유적 (遺蹟)이다. 녹청자란 토기에서 청자로 발전하는 중간과정의 것으로 매우 소중한 문화재이다. 이러한 도요지는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일본에만 두 곳이 남아 있어 일인들이 이를 세계적으로 자랑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1966년 우리 고장에서 녹청자 도요지가 발견됨으로서 일본의 원형이 한국에서 전파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이 고장은 천여년 전부터 녹청자 개척의 선구지로서 창조적인 슬기가 이어져 내려온 곳이라 할 수 있다.
◆◆ 선구적으로 개척된 역사/문화 도시
인천은 개항과 함께 실질적인 국제항구로 등장하면서 근대 서구 문물이 제일 먼저 밀고 들어온 관문이었다. 그러므로 선구적 개척지 구실을 하였을 뿐 아니라, 선구적인 인물 또한 많이 배출된 곳이기에 이를 아래에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인천은 우리나라 최초로 개설된 역사적인 사실들이 많다. - 서울과 인천간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업무가 개시됨.(1885. 9. 28) -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만국공원이 생김(현 자유공원)(1888년) -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이민이 인천항을 통해 이루어 졌음(1902년, 하와이) - 우리나라 최초의 경인간 민간전화 개통(1902. 9. 20)
]
◆◆근대 선구적인 근대문물(近代文物)의 수용◆◆
◐ 지계설치
- 1883년 9월 30일 "인천일본지계조약" 성립됨. 중앙, 관동 7,000평. - 1884년 4월 2일 "청국지계조약". 선린동 5,000평. - 1884년 10월 "각국지계". 송학, 송월, 북성동 140,000평 - 30년간 존속하다 1913년에 철폐됨.
◐ 구미각국상사(歐美各國商社) 진출
- 개항당년 영국 상선회사인 "이화양행" 출장소 설치. - 1884년 독일 "세창양행" - 1885년 미국 "타운센드양행" - 1896년 영국 "홈링거상회" - 1906년 "광창양행"
◐ 인천 ~ 상해간(上海間) 정기운항선 1883년에 개설, 매월 1~2회 운항.
◐ 근대적인 우편제도(郵便制度)
- 1884년 한성우정총국 설치 - 11월 17일 인천분국 개설 - 분국장 이상재(李商在)
◐ 경인철도(京仁鐵道) 개통
- 1897년 3월 22일 우각현 기공 - 1899년 인천 ~ 노량진간 210리 개통 - 1900년 7월 8일 한강철교 준공 후 260리 개통 - 1965년 9월 18일 경인선 복선 - 1974년 8월 15일 전철화(電鐵化)
◐ 경인간 전화(電話) 개통
- 1898년 1월 28일 인천 ~ 서울간 전화선 가설 - 1900년 7월 경인간 시외전화 개통 - 1902년 3월 시내전화 개설
◐ 경인간 전신업무(電信業務)
- 1885년 7월 "한청전선조약" 체결 - 1885년 10월 3일 전신 업무 개시 - 1885년 11월 19일 한청(韓淸)간 국제 전신 개통
◐ 영미연초공장(英美煙草工場) 담배 생산
- 1889년 12월 인천 청국지계 내에서 생산
◐ 첫 기독교 포교지(基督敎 布敎地)
- 1885년 감리교 내리(內里)교회 설립
◐ 각국 공원(各國公圓) 설치
- 1888년 11월 9일 현 자유공원 설치
◐ 인천해관(仁川海關) 설치
- 1883년 6월 16일
◐ 인천 기상관측소 설치
- 1896년 인천해관 내 - 1904년 4월 응봉산(應峯山)에 설치
◆◆인천의 선구적인 인물(人物)◆◆
◐ 우리나라 고고학(考古學)을 개척한 ----------> 고유섭(高裕燮)
◐ 여성 교육의 총본산인 이대(梨大) 총장 -------> 김활란(金活蘭)
◐ 민주당 시절 내각제(內閣制) 국무총리 --------> 장 면(張 勉)
◐ 한국화(韓國畵)의 거장(巨匠) ---------------> 이당(以當) 김은호(金殷鎬)
◐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 발명(點字發明) ----> 박두성(朴斗星) 그외 다수.
◆◆ 근대적 서구문물의 관문도??◆◆
인천은 1620여년전 능허대 개항 이후, 경인운하계획과 경서동 녹청자 도요지의 설치, 그리고 1883년의 근대적 개항을 통한 서국 문물의 도입 등으로 이미 선구적 개척지로서의 위상을 다져왔다.
그러므로, 21세기 미래의 인천은 신국제공항의 개항과 더불어 "열린 지구촌 시대"를 향한 한국의 가장 희망찬 관문 도시가 될 것이다.
◐ 최초의 외국상사(外國商社)가 진출한 선구지
개항과 더불어 많은 외국상사가 상륙함으로서 급격히 국제 무역항으로 발전하였다. 1883. 8. 19. 인천에 통상업무(通商業務)를 처리 할 감리를 설치하였다. 인천은 부산이나 원산항과 달리 개항과 더불어 청.일을 필두로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등의 외국상인들이 지계를 설정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상관(商館)을 설치운영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중심이 되어 서구의 새로운 문물이 도입되었고 각종 상품이 서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확산 보급되었다. 이들은 상업이나 무역뿐 아니라 해운, 광업, 철도, 정미업, 대금업에 이르기 까지 손을 댔으며, 일인들은 제일국립은행 인천출장소까지 중앙동에 개설(1883)하는등 근대적인 상공업의 선구지로 발전했다. 이러한 외국자본 세력의 진출에 자극받아 향토민의 자주적 민족자본세력이 형성되어 1885년 인천 객주회(客主會)가 설립되어 인천항 조선인 상업 회의소(朝鮮人 商業會議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 정치(政治), 외교(外交), 군사(軍事)활동의 중심지
1883년 인천이 개항되자 청(靑), 일(日), 미(美), 불(佛), 로(露)와 같은 열강(列强)들이 서로 다투어 이 고장에 영사관을 개설하고 그들의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각 국의 지계(地界)를 만들어 정치, 외교, 경제의 발판을 구축하고 그들의 실력을 겨루려 했다. 특히 청,일,로국의 각축전(角逐戰)은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고장 인천은 이들 삼대세력이 다툴 때마다 각국의 전함이 집결하고 군대가 상륙 하는 등 군사적인 요충지가 되기도 했으며, 각국 정치 요인이 출입하는 수도의 관문으로서 정치, 외교활동의 선구지 구실을 해왔다.
◐ 육·해상교통(陸·海上交通)의 선구적인 개척지
수도의 관문인 인천은 우리나라 육상, 해상교통 발전의 선구지로서 한국 최초의 경인철도 (京仁鐵道), 경인고속도로, 전철(電鐵)이 개통된 육상교통의 개척지이며, 해상 교통면에서도 우리나라 최초의 갑문식 '도크'를 비롯해 최초의 해상 정기항로(1883: 상해, 장기, 부산)가 개설되는 등 자랑스런 역사의 현장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다. color="black">
◐ 천일제염(天日製鹽)의 선구적 개척지
인천 주안역뒤에서 동암역 중간지역에 이르는 주안염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전 개척의 선구지이다. 1907년 1정보(一町步)규모의 천일제염 실험의 성공을 계기로 우리나라 서해안일대에 많은 염전에 개설 확장되었다.
내용출처 - http://visit.inpia.net/
|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