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인천역사학술심포지엄서 만세운동 조명(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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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기호일보(19. 4.24)
식민통치 종식 뜨거운 열망…
日 영향력 큰 인천 심장부서 치열한 시위
인천역사학술심포지엄서 만세운동 조명
▲ 양윤모 인하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이 23일 인천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 대강당에서 인천시 역사자료관 시사편찬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인천역사학술심포지엄에서 ‘인천에서의 3·1독립운동과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조현경 기자
식민지 건설의 전초 기지였던 개항장 인천에서도 서슬 퍼런 일제에 맞서 만세운동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23일 인천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 대강당에서 인천시 역사자료관 시사편찬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인천역사학술심포지엄에서 ‘인천의 3·1 운동 그리고 임시정부 수립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인천지역에서는 1919년 3월 6일부터 4월 중순까지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교)·인천공립상업학교(인천고)·만국공원(자유공원)·황어장터·덕적도·울도·문갑도 등에서 수많은 군중이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동참했다.
양윤모 인하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은 이날 심포지엄에서 "3월 6일 공립보통학교와 공립상업학교 학생들이 동맹휴업을 했고, 지역 주민 300여 명이 합세해 인천 시내를 중심으로 경인가도(京仁街道)와 만국공원 등지에서 항일독립운동을 개시했다"며 "이곳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은 매우 치열하게 전개됐다"고 소개했다.
이어 "그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체포돼 구금되고 심지어 고문까지 받았다"며 "특히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천공립보통학교 3학년 김명진은 징역 2년(최종적으로 1년 6월)을 받았는데, 이는 3·1운동 전체를 놓고 봐도 대단히 높은 형량에 속한다"고 밝혔다.
양 연구위원은 "인천의 중심 지역은 조선의 그 어떤 지역보다도 일본의 영향력이 큰 곳이었다"며 "그럼에도 인천의 학생과 민중들은 식민통치를 종식시키기 위한 첫 시위운동을 나흘 동안이나 인천 심장부에서 전개했다"고 강조했다.
또 인천이 한성임시정부의 태동지라는 의견도 나왔다. 양 연구위원은 "4월 2일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대회’가 열렸고, 이를 계기로 4월 23일 한성임시정부가 성립됐다"며 "만국공원 13도 대표자대회는 한성임시정부의 태동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토론자로 나선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는 "인천지역에서는 부평·강화·옹진 등 전 지역에서 독립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고, 운동의 양태가 다양했다"며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 및 태극기 배포, 시가지 대로상의 만세시위, 5일 장에서의 장터 만세시위, 야간 산상의 봉화 및 횃불 시위, 상점 문을 걸어 잠근 상인들의 철시시위, 친일파 색출시위, 종교인들의 시위, 운동회를 겸한 시위 등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전 계층이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아울러 강 대표는 "이처럼 인천지역의 3·1 독립운동이 대한민국 3·1 독립운동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데, 인천지역을 주제로 한 연구가 미진한 실정이다 보니 중앙 학계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며 "지역의 3·1 운동사를 전면 재고찰 할 필요가 있다"고 피력했다.
2019년 04월 24일 수요일 제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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