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조우성(65회)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20/(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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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3.12.13)
사진으로 보는 인천이야기-20
'하늘의 뜻' 날씨 과학으로 풀어내다
근대 문물의 수용(2) 인천측후소
英 그리니치 천문대와 기상정보 교환
국내 유일 천문대 운영 일식현상 관측
원통형 본관 건물 올해 무참히 철거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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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선조들은 기상 현상을 오늘날처럼 과학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가뭄이 들거나 태풍이 몰아쳐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넘어서는 하늘의 일로 보았다.
임금들은 이를 자신의 부덕이나 실정 때문이라고 여겨 스스로 제를 올려 하늘의 노여움이 거두어지기를 기원했다.
이처럼 기상 현상을 왕조나 국운의 쇠퇴와 연관을 지어 보았기에 사관들은 조선왕조실록에 별의 밝기, 달무리의 모양, 토우(土雨) 같은 여러 기상 현상을 세세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기상현상을 기초적 과학으로서 관측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부터였다.
세계 최초의 측우기를 조선 왕조가 만들었던 것은 과학사상 획기적인 사건이요, 강우량을 측정해 농업 생산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창조적 정신의 소산이었다.
그렇다고 기우제나 기청제 등을 그만 둔 것은 아니지만, 천문 기상대인 서운관을 두었고, 세종 16년 1434년에는 대간의대에 혼천의, 혼상, 규표 등을 설치했다고 전한다.
또 같은 시기에 관상감에 축조한 소간의대는 해시계인 일영대(日影臺)로도 사용됐다고 한다.
기상 관측의 절대적 요소인 온·습도, 풍속, 기압 등의 개념이 이 땅에 선보인 것은 개항기 때였다.
1886년 인천과 원산해관(지금의 세관)에 기상 관측기를 설치하고, 기상 정보를 교환했고, 러일전쟁 개전 직전인 1900년 현 중구청 뒤편 송학동에 있던 옛 수진여관 자리에 서들러 기상사무소를 개설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34년 발간된 '인천부사(仁川府史)'에는 칙령 제60호에 따라 1904년 4월10일 군사 기밀상 장소를 밝히지 않은 곳에 제3임시관측소를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천부사는 그것이 근대적 기상 관측의 남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후 1905년 1월 원래 구한국 황실 재산이었던 각국공원(현 자유공원) 북쪽 응봉산 정상의 3만평 부지에 목조 2층 69평 규모의 측후소 건물이 세워졌다.
측후소는 당시로서는 최신식 시설인 풍력계, 지동계, 일조계, 자동 강우계, 백엽상, 증발계, 온도계, 천문대 등을 완비했다.
인천측후소 소장으로는 일본중앙기상대 기사였던 '와다(和田)' 박사가 부임해 기틀을 잡았는데, 소원들은 매일 오후 3시의 천기예보와 폭풍우 신호, 정오 시보를 발했고, 경성측후소를 비롯해 부산, 대구, 목포, 강릉, 평양, 용암포, 원산, 성진, 중강진, 웅기 등 전국 12개 측후소를 관할하는 한편 일본중앙기상대와 런던 그리니치 천문대 등과도 기상 정보를 교환했다고 한다.
그 후 인천측후소는 국내 유일의 천문대를 운영해 1941년 9월21일 오후 1시17분에 있던 일식을 관측했다고 당시 경성일보가 전하고 있다.
광복 후 정부는 1945년 9월 인천기상대를 국립 중앙기상대로 재발족시켰으나 6·25전쟁 통에 대부분의 시설이 파괴됐고, 1953년 중앙기상대의 업무를 서울로 이전해 인천은 지역 측후소로 축소됐다가 1992년 정부 조직 개편에 따라 인천기상대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같은 이 땅 초유의 기상관측사를 지닌 인천기상대의 본관 원통형 건물이 올해 들어 사무실이 협소하다는 이유로 무참히 철거돼 뜻 있는 이들의 빈축을 산 바 있다.
문화 선진국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문화 파괴 행위'가 아직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소진된 세창양행 사택 등은 그렇다 쳐도 대불호텔, 조양상선, 알렌별장, 인천각, 오례당 등 그간 우리가 스스로 헐어 버렸거나 화재로 잃어버린 건물을 생각하면 낯이 뜨거워진다.
1 초창기 인천측후소
지금의 자유공원 북쪽 응봉산 정상에 세워진 인천측후소 원경이다.
키 작은 나무들이 산기슭을 덮고 있다.
앞쪽의 단층 건물 용도는 미상이다.
2 목조 본관
초기 인천측후소 전경을 담은 사진엽서이다.
목조 2층 건물로 세칭 '화양(和洋) 절충'의 식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 앞에 '백엽상'이 난란히 서 있다.
3 신관 준공
러일전쟁 직후 기상 정보의 중요성이 요구되자 1905년 1월 과거의 목조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슬라브조 신 청사를 준공했다.
그러나 아직 천문대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4 원통형 백색 본관
조선총독부 인천측후소는 일제강점기 내내 중앙기상대 역할을 수행했다.
최근 기상청은 이 유서 깊은 건물을 무단히 철거해 사회적 빈축을 샀다.
5 1940년대의 인천측후소
인천측후소에 국내 최초의 천문대가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맨 오른쪽에 있는 '돔' 건물이 천문대다.
양쪽에는 송신용 안테나 철탑이 서있다.
6 일식 관측
1941년 9월 21일자 일문지(日文紙) 경성일보에 소개된 '일식 관측' 보도 내용이다.
인천천문대에 설치된 천체망원경의 모습이 소개된 유일한 자료 사진이다.
/조우성(주필)·사진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검단 선사박물관, 일제강점기 사진엽서, 필자.
2013년 12월 1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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