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랑
[仁川歷史] 이경종(53회)의 KBS '인간극장'/아버지의 유월 1부(2016/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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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유월 1부(2016/06/06)
방송일시 : 2016년 06월 06일(월) 오전 07:50
아버지의 유월
방송일 : 2016년 6월 6일(월) ~ 6월 10일(금) / 오전 7:50~8:25
방송매체 : KBS1-TV
보도자료 문의 : 김희윤 취재작가 (02-782-5555)
인천광역시 중구의 한 치과 건물 1층엔 특별한 장소가 존재한다.
바로 ‘인천학생 6.25 참전관’!
이곳엔 특별한 사연을 가진 부자가 있다…
1950년, 고작 열여섯의 나이로 전쟁터에 뛰어든 이경종(83) 씨.
그는 함박눈이 내리던 겨울 날, 동네 형들을 따라 300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인천을 출발해 부산까지 20여일을 걸어가 자원입대했다.
전쟁이 끝나고 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에게 남은 건
제대증과 평생 앓게 된 허리 병, 중학교 중퇴 학력뿐이었다.
전쟁에 참여하느라 정규교육을 마치지 못한 청년 경종 씬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한 채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다.
27살이 되던 해, 독립운동가의 딸인 아내 김동숙(83) 씨를
소개로 만나 결혼한 후 삼형제를 낳아 기르며 열심히 살았지만
평생 가난한 삶은 변하지 않았다.
그 후 1996년. 46년만에야 비로소 '참전용사증'을 받으며
참전 군인임을 인정받지만,
그 종이 한 장이 그의 삶을 모두 보상해줄 순 없었다.
경종 씬 그 종이를 붙들고 한참이나 울었다.
경종 씨의 허탈한 눈물을 보며 아버지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
기념사업을 제안 한 건 다름 아닌 치과의사인 맏아들 이규원(55) 씨!
규원 씬 아버지에게 카메라와 녹음기, 자금을 지원했고,
아버지 경종 씬 10여년에 걸쳐 198명의 학도의용대 출신을 만나
그들의 육성을 녹음하고, 색 바랜 사진을 수집했다.
그렇게 잊혀진 인천 학도병들을 위해 20년간 아들 규원 씨와 함께
직접 발로 뛰어가며 자료를 모으고, 학도병들의 육성을 기록해가며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인천학생 6·25참전관'이다.
그저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어린 학도병들의 충정이
영원히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해
150평 규모의 참전관을 이룬 학도병출신 아버지와 아들의 20년 여정!
그리고 부자가 남기고 싶은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인간극장에서 함께한다.
# 열여섯의 나이로 전쟁터에 뛰어들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빼앗겼던 인천을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수복했을 때!
인천지역의 중고등학생들은 자발적으로 학생 의용대를 조직했고,
공권력이 채 수습되지 못한 인천 지역을 지켰다.
그러다 중공군의 가세로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을 무렵인 12월.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으로 학생의용대에서 활동하던 경종 씨는
대학생 형들의 보호 하에 300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남부지방으로 피신하던 중, 12월 18일에 육군에 자원입대를 했다.
제대로 된 군번도 없이, 탈영병의 군번을 받아
4년간 치열한 전투 현장을 누볐던 그는 19살이 되던 1953년이 되어서야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진짜 군번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5년 만에 청년이 되어 고향 인천으로 돌아온 그에게 남은 건
제대증과 평생 앓게 된 허리 병, 중학교 중퇴 학력이 전부였다.
당시 함께 참전한 인천학생들 가운데 208명은
영영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전쟁터의 꽃이 되었다.
한창 배우고 공부해야 할 나이를 전쟁터에서 보내고,
정규교육조차 마치지 못한 잊혀진 학도의용군 출신의 청년 이경종 씬
막노동은 물론,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근근이 삶을 이어가야 했다.
이후 1996년이 돼서야 비로소 '참전용사증'을 받으며
참전 군인임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 종이 한 장이 그의 삶을 모두 보상해줄 순 없었다.
열여섯 어린나이에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웠지만,
나라에서 받은 건 참전을 인정하는 달랑 종이 한 장이 전부였다.
# 학도의용군이었던 아버지, 그리고 아들이 만든 150평의 전시관
먹고사는 일 조차 빠듯했던 그 시절,
없는 형편에 세 아들을 공부시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날 맏아들 이규원(55) 씨가 집안 형편을 생각해
빨리 취직해 집안을 돕겠다며 공고에 진학하겠다는 생각을 밝혔다.
하지만 아버진 똑똑했던 아들 규원 씨를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시켰고.
3년 후, 가난한 세탁소 집 맏아들 규원 씬 명문대 치과대학에 입학했다.
지금의 ‘인천학생 6·25참전관’을 설립한 건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열심히 공부해 치과의사가 된 아들의 효심에서였다.
‘참전용사증’을 받은 뒤 허탈함에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를 보며
아들 규원 씨가 먼저 기념사업을 제안했다.
규원 씬 아버지에게 카메라와 녹음기 그리고 자금을 지원했고,
아버지 경종 씬, 10여년에 걸쳐 198명의 학도의용대 출신을 만나
당시 상황을 회상하는 육성을 녹음하고 색 바랜 사진을 수집했다.
그렇게 아버지의 발로 뛰는 노력과, 아들의 지원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인천학생 6·25참전관'이다.
국가나 지역의 어떠한 지원도 받지 않고
오직 두 부자의 힘으로만 설립한 이 참전관엔
6·25전쟁과 인천 학도 의용군들에 관한 수많은 유물들이 보관돼 있다.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20년 전 시작한 작은 전시관은
지금 개인이 기록하고 모은 전시물로는 유례가 없을 만큼
방대하고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매년 국방대학원 등
전문가들의 현장 수업까지 이루어질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어느덧 이 일을 시작한 지도 20년.
그간 월세, 전세로 옮겨 다니던 참전관은 딱 20년이 되는 올해
완전히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참전관의 개관식을 위해 아버지와 아들,
손자 이근표(29) 씨까지 나섰다!
개관식을 준비하는 할아버지의 얼굴엔 수만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데…
과연 개관식은 무사히 끝마칠 수 있을까?
# 모든 아버지들을 위한 ‘아버지의 유월’
덜 자란 키 때문에 해병대 지원을 거절당할 만큼
작고 여렸던 열여섯 소년은
어느덧 여든 셋의 노인이 되었다.
6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한두 해 해온 일도 아니건만 여전히 학도병들을 만나러 갈 때면
할아버지는 가슴이 벅차고, 또 아프다.
세상이 기억해주지 않은 인천학도병들을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한
부자의 노력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규원 씨가 건물 1, 2층엔 참전관을, 3층엔 치과를 둔 이유도
치과 환자들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관람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또한 2007년에 시작 되어 현재 4권까지 펴낸 <인천학생 6·25참전사>는
10권까지의 발간을 목표로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언제나 매일같이 참전관을 찾는 아버지 경종 씨,
꽃 같은 나이에 전쟁터에서 삶을 마감한 동료들의 사진 액자를 닦고,
그들의 흔적이 가득한 참전관을 돌아볼 때면 아직도 눈물이 흐른다.
중, 고등학교를 다니며 나라의 보호를 받았어야 할 어린나이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 바쳐 싸웠지만 세월 속에 잊혀 진 인천 학도병들…
이경종 씨 부자는 그저 그들이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길 바랄 뿐이다.
아버지가 되지 못한 또 다른 아버지들을 위해 달려온 이경종 씨 부자의 20년,
아버지의 가슴 아픈 유월의 이야기를 인간극장에서 전한다.
<1부 줄거리>
인천 학도의용대원이었던 이경종 할아버지는 16살의 나이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할아버진 20년째 인천학도의용대의 역사 찾는 일을 계속 하고 있다.
치과의사인 큰아들 규원 씬, 아버지의 일을 물심양면 도와온 든든한 후원자다.
어느 날, 치과 진료로 한창 바쁘게 보내야 할 낮 시간! 예고도 없이 규원 씨가 부모님 댁에 찾아왔다.
연출 : 임준현
글 : 원효진
촬영 : 서연택
조연출 : 백소혜
취재작가 : 김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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