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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歷史] 조광원(19회) 성공회 신부 독립운동기념비 제막식(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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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국민일보(17. 8.14)
독립운동 위해 바친 삶, 영원히 기억될 것
조광원 성공회 신부 독립운동기념비 제막식
잘 가꿔진 잔디 위로 햇빛이 내리 쪼이는 13일 오후 3시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대한성공회 온수리교회(김영회 신부) 마당. 교회 성도들과 길상면사무소 직원 유가족 등 100여명이 모여 조광원(1897∼1972) 신부 독립운동기념비 제막식을 거행했다. 조 신부는 일제강점기 미국 하와이에서 독립운동과 한인 선교에 힘썼다.
‘일본이 우리의 토지를 훔친 지 40년째다. 피를 흘려 되찾은 땅의 권리는 영원할 것.’
기념비에는 조 신부가 1944년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인 ‘국민보’에 게재한 ‘권리와 사상’ 기고가 새겨져 있었다. 조 신부는 1897년 강화군에서 태어나 1923년 조선에 파견된 영국성공회 선교단 제3대 마크 트롤로프 주교의 권유로 하와이 호놀룰루로 파송됐다.
조 신부는 성공회 학교인 이올라니 스쿨에서 공부하며 성 누가 한인교회 건축을 주도하고 조선인 전도와 한글 교육을 맡았다. 1931년에는 하와이 교구장인 리틀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아 해외에서 성직을 받은 최초의 대한성공회 교인이 됐다.
조 신부는 같은 해 독립운동가 박용만 선생이 이끄는 조선독립단에 가입해 하와이총지부 위원으로 기관지 ‘태평양시사’ 발행에 참여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1941년에는 한인자위단을 조직해 일본인 첩자를 색출했고 독립자금을 모았다.
1944년에는 미 해병대 종군 신부로 사이판 전투에 참전했다. 일본군 민간인 포로수용소에 뛰어들어 강제 징용된 한국인 구출에 힘썼다. 조 신부의 활약상은 미군 신문인 성조지에 실리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성공회대 전신인 성미카엘신학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정부는 1999년 그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제 신학교 지도교수로 저를 막내아들처럼 끔찍이 아껴주셨던 분입니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자랑스러운 분이에요”
축사를 맡은 김성수 주교가 조 신부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행사를 뒤에서 지켜보던 김 신부는 “사회적으로 조명받지 못한 조 신부의 애국심을 오늘날 다시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강화=글·사진 김동우 기자 love@kmib.co.kr
입력 : 2017-08-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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